지난해 10월1일 중국 베이징의 천안문광장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70주년을 기념하는 군사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무개차를 타고 사열에 나선 시진핑 국가주석이 열병하는 부대를 향해 인사말로 격려하면 군인들은 짧게 대꾸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당시 시 주석이 "동지들 안녕!"이라고 격려하면, 군인들은 "주석님 안녕하십니까"라고 화답했고, 이어 시 주석이 "동지들 수고가 많다!"라고 하면 군인들도 다시 "인민을 위해 복무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중국의 군사 퍼레이드는 구소련 시절 모스크바의 붉은광장 열병식에서 유래됐다. 덩샤오핑 이래 중국 최고지도자와 군인들 간에 오간 간결한 언어는 중국이라는 공산당 일당독재 체제의 성격을 정확하게 드러낸다. 최고지도자는 인민의 존경을 받는 어버이 같은 존재로서 인민을 다독거리고, 군인들은 '인민을 위해 봉사하라'는 마오쩌둥 주석의 교시를 금과옥조처럼 받들어 봉사하는 조화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곳이 중국이다.
무엇보다 이들끼리 주고받는 '동지들 안녕'이라는 안부는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편가르기 인식이 뿌리박힌 사회주의 문화의 소산이다. 공산당은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와 내전을 치른 끝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이후 문화대혁명과 천안문사태 등 굵직굵직한 현대사를 거치면서 중국 사회는 자연스레 적과 동지를 가르는 게 일상이 됐다.
대중에게 노출되는 시진핑 주석 등 중국 최고지도자의 언어는 간결하고 메시지가 분명하다. 중국 인민은 늘 공산당으로부터 적인가 동지인가의 시험대에 오른다. 적으로 간주되면 가차 없는 처분이 뒤따른다.
"오늘부터 저는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저를 지지하지 않은 국민 한분 한분도 저의 국민이고, 우리의 국민으로 섬기겠습니다. 저는 감히 약속드립니다. 2017년 5월10일, 이날은 진정한 국민 통합이 시작되는 날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문재인과 더불어민주당 정부에서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를 다시 꺼냈다. 취임사는 가슴에 와 닿는 주옥같은 언어로 국민을 감동시켰다. 지금껏 경험한 대통령들과는 다른, 낮은 자세로 국민을 섬기고 소통하는 통합의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남다른 기대감이 컸다. 임기 1년 반이 남은 시점에서 대통령의 언어를 한 줄씩 밑줄 그어가면서 다시 읽었다. 메시지는 허공으로 흩어졌고 통합과 소통의 통치철학은 껍데기로 변했다.
지난 3년 반 동안 대한민국은 대통령 취임사와는 다른 방향으로 역주행했다. 문 대통령은 국민 모두가 아닌 어느 한쪽 편에 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대통령을 비판하는 보수성향 단체가 8·15집회를 열자 대통령 비서실장은 그들을 '살인자'라고 대놓고 비난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임대인과 임차인, 대기업과 소상공인, 기업인과 노동자, 내 편과 네 편으로 편을 가르는 건 우리나라에서도 일상화됐다.
문 대통령이 연일 쏟아내는 언어에서는 중국의 적과 동지 구분보다 더 강한 편가름이 묻어났다. 그 연원을 따지자면 문 대통령의 주변에 포진하고 있는 586 운동권세력들의 철지난 동지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80년대 운동권 세력과 함께 성장하고 인권변호사를 문 대통령의 이력은 '우리는 언제나 선하다' 라는 선민의식과 상대를 적으로 돌리는 이분법에 빠지게 했다. 코로나19 사태 속에 광화문집회를 주최한 보수세력은 차벽을 설치해서 막았지만, 민주노총 등의 집회에 대해서는 차벽 대신 방역수칙 준수를 요구하는 것으로 그쳤다.
문 대통령은 지난 15일 국무회의에서도 "한국 민주주의의 오랜 숙원이었던 권력기관 개혁의 제도화가 드디어 완성됐다"라며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는 정권의 권력형 비리에 사정의 칼을 하나 더 만드는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독재와 연결시킬 수 있는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그 시각 과천의 법무부에선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두번째 징계위위원회가 열리고 있었다. '살아있는 권력 수사'를 지휘하는 검찰총장을 찍어내려는 의도로 무리하게 진행된다는 비판에 직면한 징계위에 대해 절차적 공정성만을 강조한 대통령의 언어. 징계위가 열리는 시각 "공수처 신설은 정권의 권력형 비리에 사정의 칼을 하나 더 만드는 것"이라고 강변한 대통령의 수사는 지난해 7월 윤 총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할 때 덕담으로 건넨 것과 판박이다. 대통령의 속뜻은 '사정의 칼을 하나 더 쥐어준다고 하더라도 살아있는 권력에 대해선 수사하지 말라'는 뜻이 아닐까.
공수처가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진 중국의 국가감찰위원회를 판박이로 닮았다는 사실을 굳이 상기할 필요도 없다. 적과 동지를 구분하고자 하는 권력의 속성은 중국이나 한국이나 다를 바가 없다. 선한 대통령의 눈에는 남의 티끌은 크게 보이지만 내 눈의 대들보는 보이지 않는다. 문 대통령에게 대통령 취임사를 꺼내서 일독해보시기를 간곡하게 권한다.
서명수 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