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미(反美)면 어떤가?’외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가장 먼저 미국을 방문했다. 그리고는 이라크에 파병했고 한미 FTA를 추진했다. 대선에서 정치적으로 반미를 활용했지만 당선되자 ‘국익’을 선택했다. 반미노선 노무현의 변신(?)은 미국은 우리가 선택하고 버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대통령이 되고서야 확인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중국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오래전부터 착각의 늪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개혁개방을 추진해 온 중국이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G2의 위상을 확보하고 미국에 맞선 새로운 국제 질서를 형성하려고 하자 미국을 대신한 중국의 역할을 기대하면서 중국으로 경도된 움직임이 우리 내부에 존재한다. 그것은 80년대 운동권 세력들의 뿌리 깊은 ‘반미’의식에서 비롯된 정서기도 하고,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가 만들어 낸 사회주의 중국, 마오쩌둥 중국에 대한 오도된 중국관의 영향이기도 하다.
패권 국가 미국에 반대하고 중국을 존중하고 좋아하고 기대를 걸면, 중국도 우리의 선한 의도를 알고 적절하게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켜줄 것이라는 착각이 팽배하다.
초강대국 미국의 횡포를 지적하고 비난하는 반미주의자는 미국의 대척점에 중국을 상정하고 있다. 이는 ‘나쁜 미국’ 대 ‘착한 중국’이라는 그럴듯한 환상을 가능한 현실로 존재할 수 있도록 한 바탕이다. 심지어 동북아에서는 우리가 미국을 버리면 중국이 우리를 보호해줄 것이라는 환상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사드 배치에 대한 중국의 전방위적인 보복과 가까이는 이번 중국의 요소수 수출금지에 따른 대란 사태는 우리 사회의 친중 세력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착한 중국이, 미국을 미워하고 배척하면서 중국을 존중하면서 친중을 넘어 ‘숭중’(崇中, 사대를 넘어 중국을 숭상하는)의 차원에 이를 정도로 중국노선을 견지하고 있는 우리 정부를 이렇게까지 푸대접하는 것을 논리적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지금처럼 국제적 위상이 높지 않았을 때도 중국의 대외전략은 늘 일방적이었고 패권적이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김대중 정부 시절, 우리는 중국과 무역 분쟁을 겪으면서 대중 굴욕이라는 외교 참사를 경험한 바 있다. 이른바 마늘 파동이 그것이다. 중국산 저가 마늘의 대량 수입으로 국내산 마늘가격이 폭락하는 등 마늘 농가 피해가 예상되자 정부가 중국산 마늘에 대한 ‘세이프가드’를 발동한 것이다. 중국은 발끈해서 당시 우리의 주력 대중수출품이었던 한국산 휴대폰과 폴리에틸렌에 대한 수입을 전면금지했다. 양국의 수출입 규모로 보면 말도 되지 않는 맞대응조치였다. 정부가 화들짝 놀라 부랴부랴 대중협상에 나섰지만, 세이프가드 철회와 수입중단조치 이전에 구매하기로 한 중국산 마늘 추가구매 등 중국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수용한 굴욕을 겪었다.
역사적으로도 ‘선한’ 중국은 단 한 차례도 우리에게 존재한 적이 없다. 왕조가 바뀔 때마다 중국은 우리나라를 침략했고, 심지어 임진왜란 때 원군(援軍)으로 조선에 온 이여송이 이끈 5만의 명군(明軍)은 왜군을 물리치기는커녕 왜군보다 더 악랄하게 조선을 수탈했다.
그런데도 미국과 일본을 만만하게 보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는 것 같다. 만만하다는 게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지 76년이 지났지만, 일상적으로 일제 잔재와 친일청산이 정치구호로 등장하곤 한다. 걸핏하면 반일캠페인이 벌어지고 권력의 심장부인 청와대 수석이 ‘죽창가‘를 내지르면 대통령은 이순신 장군을 거론하면서 반일캠페인을 부추기는 것이 우리나라다. 불과 2년여 전이었다.
친일과 반일, 친미와 반미, 친중과 반중이 정치적으로 국가 노선에서 어떠한 의미로 수용되는지 국익에 대한 세심한 검토 없이 상시로 외교전략이 국내정치용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잦은 반일캠페인에 비해 여권의 중국 짝사랑은 요지부동이다.
송영길 민주당 대표는 대표적인 여권 내 중국통이다. 인천시장에서 낙선한 후 칭화대 방문학자로 베이징에서 1년여 공부하기도 했다. 그런 이력의 송 대표가 사드 보복이나 작금의 요소수 사태 등에 대해 중국을 비난하거나 수출금지조치에 대해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정부 역시 중국에 대해서는 꿀 먹은 벙어리다. 일본에 대해서는 언제라도 ‘죽창가’를 내세우며 선동하던 그 기세가 중국 앞에만 서면 한없이 초라해진다.
국제관계에서 더 분명한 것은 불편하고 부당한 양국관계에 대해 지적하고 당당하게 자국의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국익을 지켜내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착한 중국은 지금껏 존재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기대하기 어렵다. 대국의 자세를 중국에 요구할 것이 아니라 미국과 일본, 중국에 국익에 따른 당당한 외교전략을 수립하고 전개하는 것이 불한당 중국에 대처하는 기본전략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서명수 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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