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1999년 사이언스 코미디 영화 '블래스트(Blast From The Past)'는 마치 지난 몇년 간의 우리들 모습 같다.
시대적 배경은 미소 냉전기. 언제 전쟁이 날지 모르는 공포감에 한 가정은 방공호로 들어가 35년 간의 '격리 생활'을 하기로 한다.
"코로나 거리두기와 공연 없는 날들, 그리고 세계 전쟁 같은 상황이 흡사 우리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모든 것이 '우울'로 점철된 날들이었지만, 그래도 '블래스트' 주인공들처럼 소소한 일상의 재미를 느끼며 조금은 밝게 살아가고 싶었습니다."
록 밴드 보울스 멤버들, 서건호(보컬·기타), 박준성(기타), 윤현섭(베이스·트럼펫), 이학수(드럼), 임성현(키보드)이 말했다.
이들의 3집 '과거로부터의 폭발(Blast From The Past)'(2022)는 올해 록신을 대표할 만하다. 블루스, 펑크(Funk), 포크, 사이키델릭 정서를 아우른 전작들을 잇고 한 뼘 더 듣기 편안한 '보울스 식 팝록 스타일'을 구현해 낸 음반이다.
음반 전체 프로듀싱을 맡은 이들은 프랑스 밴드 타히티80의 베이시스트 페드로 르상드와 보컬 자비에르 부와예르. 올해 8월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무대로 내한한 그들은 본보 기자와의 인터뷰 당시 "프랑스 밴드로서 우리가 미국, 영국 밴드와 사운드의 질감이 다르고 독특한 것처럼 더보울스에서도 비슷한 지점을 느꼈다. 소프트 록과 인디 록의 특징을 지녔지만 한국적 배경이 아주 이국적으로 들리는 팀"이라고 했다.
최근 서울 마포구 서교동 아크스튜디오에서 만난 록 밴드 보울스 멤버들, 서건호(보컬·기타), 박준성(기타), 윤현섭(베이스·트럼펫), 이학수(드럼), 임성현(키보드).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최근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스튜디오아크에서 만난 보울스 멤버들은 "지난 2년 간 타히티80 멤버들과 50여 곡이 넘는 데모를 전달하며 음반을 함께 만들었다. 사운드적인 측면 뿐 아니라, 창작자로서는 완벽주의, 삶에서는 자유분방하고 여유 있는 태도를 많이 배울 수 있었다"고 했다.
서건호, 박준성은 평시 내한 음악가의 통역과 의전 업무도 겸한다. 2018년 타히티80 내한 당시에도 일을 도와줬고, 소주잔을 기울이며 연을 맺었다. 이후 더보울스 음반들을 보냈더니 답메일이 왔다. '3집을 프로듀싱하고 싶다'고. "2020년 5월13일자 프랑스행 비행기까지 끊었지만, 코로나 확산세가 일며 비대면 소통으로 전환해야 했어요." 지난 2년 간 프랑스 시간으로 밤 8~9시(우리나라 시간 새벽 3-4시)면 메신저가 울려댔다. "거의 프랑스인이었죠. 1년 반 동안 하루 2~3시간 잤던 것 같아요."
록 밴드(드럼·베이스·기타) 기본 편성에다 트럼펫·멜로트론·하몬드 오르건·신디사이저(리얼악기)부터 합시코드·밴조(가상악기)까지 아우른 음악 세계는 다채롭다. 음반 첫 문을 여는 'Mr.Love'의 경우 60~70년대 톰 패티식 하트랜드 록 장르의 올스스쿨 향수가 아른거린다. "사랑의 신이 있다면 가정하고 인류애적 사랑을 바라는 내용입니다. 우리 삶은 지금도 전쟁과 같은 소용돌이잖아요."(서건호)
음반과 동명의 셀프 타이틀곡 'Blast From The Past'는 록에서 본격 팝의 영역로 횡단하는 인상을 주는 곡이다. 신디사이저와 스트링(현악소리) 패드를 겹으로 쌓고, 두 대의 일렉기타와 신스 베이스, 효과음(FX)을 섞어 영화처럼 사이언스 픽션 같은 인상을 준다. 서건호는 "영화처럼 가사는 이 순간이 지나가면, 잡을 수 없으니 놓치지 말라는 내용"이라 했다.
후반에 배치된 곡 'Round&Round'는 쉴 새 없이 등장하는 변주가 눈에 띈다. 다이나믹한 곡 구성은 흡사 전쟁 같은 삶의 형상화지만, 춤을 은유한 노랫말은 산들거리는 음표들에 실려 나온다. 깨어진 창틈 사이 실바늘처럼 새어나오는 빛 같다.
최근 서울 마포구 서교동 아크스튜디오에서 만난 록 밴드 보울스 멤버들, 서건호(보컬·기타), 박준성(기타), 윤현섭(베이스·트럼펫), 이학수(드럼), 임성현(키보드).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평단에서도 이들 음악은 특정 장르로 규정하지 않는다. 스틸리 댄(Steely Dan) 같은 팝록 스타일부터 에그 스톤 같은 스웨디시 팝, 그리고 A.O.R 밴드들까지 다채로운 이름들이 오르내리는데, 이들은 "이번 3집에서는 전작들보다 실제 악기 비중을 늘리고, 해외 클럽 구석에 갖다놔도 이질감이 없을 팝록 사운드로 귀결해보려 했다"고 했다.
타히티80 페드로와 자비에르는 작업 기간 애정 어린 독설도 서슴지 않았다. 10cc 같은 1970년대 소프트록 계열 사운드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하면서도 "32마디의 기타솔로는 16마디로 줄여라. 한국에 가면 너희들 기타줄 5개를 잘라 버리겠다"며 "그래야 액기스 멜로디가 나온다"는 식의 조언을 건넸다고. "삶에 대한 태도에서도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독설 끝에는 늘 '음악 작업은 행복해야 한다'는 말을 덧붙여주며 응원해줬어요."(서건호)
최근 서울 마포구 서교동 아크스튜디오에서 만난 록 밴드 보울스 멤버들, 서건호(보컬·기타), 박준성(기타), 윤현섭(베이스·트럼펫), 이학수(드럼), 임성현(키보드).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마지막으로 이번 앨범을 '여행지'에 빗댄다면 하고 물었다.
"저는 박물관 같은 곳이 아닐까 생각해요. 처음 들어가면 평소 맡을 수 없는 향이 나고, 무섭고 생경한데, 흥미있는 분위기도 있고. 어쨌든 과거를 보면서, 미래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 면에서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아요."(임성현)
"저는 공간 보다는 상황이긴 한데, 눈이 오는 겨울 새벽으로 하겠습니다. 눈 오는 걸 되게 좋아하는데 오면 옛날 생각이 나더라고요. 앨범은 추우면서도 따뜻한, 그리고 슬프기도 한데 좋기도 한 것 같아서 아름답게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박준성)
"저는 백화점. 한 가지 품목만 있는게 아니고 전자제품 코너도 있고, 여러 코너들이 있는데, 여러 장르들이 있다고 생각하고, 각자 다른 취향 가지고 오는 것처럼 찾을 수 있는..."(윤현섭)
"아니, 멋있고 아름다운 표현들 놔두고 백화점식 앨범?"(서건호)
"왜, 전 세계 각지에서 '손님들'이 오면 좋잖아! 저는 뜻을 굽힐 생각 없습니다."(윤현섭)
"진짜 특이한 친구죠? 하하하."(멤버들)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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