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의 제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적으로 풀이하면 '왕관이 없는 제왕'이라는 뜻입니다. 왕정시대에서 왕이 되려면 '쿠데타'를 통해 기존 왕정을 뒤집어 엎거나 왕가의 핏줄을 타고 나야만 합니다. 그래야 왕관을 쓰고, 제왕으로 군림해 권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무관의 제왕은 왕관을 쓰지도 않았는데 왕이랍니다. 총칼의 힘을 빌리지도 않고, '족보'도 없는데, 왕의 힘만큼을 행사한다는 뜻일겁니다.
역사적으로 처음 '무관의 제왕' 칭호를 받은 인물은 조선시대 양반들이 우러러 죽고 못사는 유교의 창시자 '공자'일겁니다. 사기라는 역사서를 저술한 사마천이 공자를 '무관의 제왕'으로 평가했습니다.
사마천은 당시 세상사 유명한 인물을 기록한 '세가'라는 편에서 공자에게 '무면지왕'(無冕之王)이라는 칭호를 붙였습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왕의 상징인 면류관을 쓰지 않은 왕'이라는 뜻입니다.
사마천은 세가에서 '공자는 평생 높은 벼슬을 오래 하지 못했고 현실에 좌절하고 떠돌아 다녔을지라도, 그의 가르침은 오늘날 수많은 사람이 받든다'고 평가했습니다. 비록 면류관을 쓴 왕은 아닐지라도, 세상사람들에게 왕만큼 충분한 영향력을 보여줬다는 의미일겁니다.
25년 기자직, 처음보는 모습에 '그냥 벙벙'
현대에서는 '무관의 제왕'을 언론에 비유해 씁니다. 언론은 검찰이나 경찰 등이 가진 강제수사력도 없고, 법원처럼 판결로 세상질서를 바꾸는 강제적인 권한도 없습니다. 국회처럼 법을 만드는 입법기능을 통해 국민들의 삶에 변화를 주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중국 5대 경전 가운데 하나인 서경에 나오는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을 무기로 여론을 형성해 세상을 바꾸는 데 일조합니다. 언론의 첨병인 기자는 흔히 말하는 '펜대', 요즘에는 노트북 자판을 통해 때로는 사람들을 울리고, 때로는 분노하게 만듭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더 나은 세상’을 꿈꿉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언론에 '제 4부'라는 이름도 붙였습니다. 민주국가에서 필수적인 3권분립(입법, 사법, 행정부)과 맞먹는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찬사입니다.
여기까지는 ‘이상’입니다. 세상사 다 그렇듯 ‘이상’보다 처절한 것이 ‘현실’입니다. 화천대유자산관리 대주주 김만배씨가 ‘중앙일보’ ‘한겨레’ ‘한국일보’ ‘채널A'를 비롯한 기자들에게 거액의 돈을 거래하고, 명품도 사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수십 명의 기자가 골프를 칠 때마다 적게는 100만원에서 수백만원을 접대받았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기자직을 25년 가까이 했지만, 기자끼리 수억원의 거액을 주고 받는다는 소리는 처음 들었습니다. 영화가 아닌 현실로 닥치니 ‘팩트가 맞나’는 생각에 그냥 벙벙할 뿐입니다.
그래도 '땅개'가 많다
‘검사님의 속사정’(2011년 12월, 저자 한겨레 이순혁)이라는 책을 보면 대한민국 검사 가운데 80%, 즉 10명 중 8명은 지방에서만 맴도는 형사 및 공판부 소속이라고 합니다. 매일 쌓이는 수백건의 사건조서 속에 파묻혀 살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가며 성실하게 근무하는 검사들입니다. 책에서는 이들이 스스로를 가리켜 ‘땅개’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김만배씨 사건에 연루된 기자들이 소속된 언론사는 강도 높은 조사를 시작했거나, 한겨레의 경우 편집국장 및 대표이사를 비롯한 고위직들이 사퇴의사를 밝혔습니다. 기자협회를 비롯한 언론 유관단체들도 자성의 목소리를 앞다퉈 내놓습니다.
그렇다고 이미 금간 신뢰가 회복되지는 않을 겁니다. '기자가 망쳐놓은 기자의 짬짜미' 속에 ‘땅개’들은 그저 하늘만 한번 쳐다볼 뿐입니다.
그래도 기억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런 기레기’보다는 ‘묵묵한 땅개’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요.
오승주 사회부장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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