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재영 기자]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사업장 부실 책임을 두고 증권사(대주단)와 신탁사 간 수백억원대 소송전이 격화되는 가운데, 국내 상법 및 신탁법 권위자들이 소송 진행 중인 재판부에 "신탁사의 대출 원리금 전액 배상은 자본시장법 위반"이라는 공식 의견서를 제출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통상 학계가 확정된 판결을 두고 사후 논문을 통해 비판하는 경우는 있지만, 소송 중인 사안에 의견서를 내는 것은 이례적인 일입니다. 이는 최근 신탁사가 패소한 1심 판결이 이대로 대법원에서 확정될 경우, 수십 년간 쌓아온 금융 규제의 핵심 법리가 무너질 수 있다는 학계의 우려감이 표출된 결과로 풀이됩니다.
4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한국투자증권과 메리츠증권 등이 KB부동산신탁을 상대로 제기한 책임준공 미이행 손해배상 청구 소송 재판부에 서울대 로스쿨(노혁준·이계정 교수)과 성균관대 로스쿨(남궁주현 교수) 등 주요 법학자들의 의견서가 비중 있는 증거자료로 제출됐습니다.
이번 소송전의 최대 화두는 단연 학계의 이례적 등판입니다. 교수진이 직접 법원에 의견서를 제출하며 행동에 나선 배경에는 '자본시장법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근래 전국 23개 새마을금고가 신한자산신탁을 상대로 낸 소송 등에서 일부 1심 재판부는 "책임준공 의무를 지키지 못한 신탁사가 대주단에 대출 원리금 전액을 배상하라"며 신탁사 패소 판결을 내린 바 있습니다. 이후 비슷한 소송이 번지며 신탁사들의 배상 책임 부담이 가중되는 추세입니다.
법학자들은 이러한 1심 판결에 대해 이 논리대로 판결이 최종 확정돼 선례로 굳어지는 상황을 걱정했습니다. 단순한 사적 계약 문제가 아니라, 금융 시장 안전판 역할을 하는 강행법규가 무력화될 수 있다는 경계심입니다.
교수진은 신탁사가 실손(실제 발생 손해) 범위를 초과해 대출 원리금과 연체이자 전체를 배상하도록 한 약정 자체가 무효라고 봤습니다. 구체적으로 자본시장법 제55조(손실보전 등의 금지)와 제103조(신탁재산의 제한 등)를 위반하는 행위라고 지적했습니다. 자본시장법은 금융투자업자(신탁사)가 정당한 사유 없이 투자자(대주단)가 입은 손실의 전부 또는 일부를 보전해 주거나, 일정한 이익을 사후에 제공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습니다. 투자 위험은 원칙적으로 수익자에게 귀속되어야 한다는 '자기책임주의' 때문입니다. 특히 교수진은 신탁사가 책임준공 미이행을 빌미로 대주단의 원리금을 사실상 전액 보장해 주는 것은, 자본시장법이 금지한 '지급보증'을 우회하는 탈법적 약정이라는 견해도 밝혔습니다.
학계가 법리 붕괴 우려를 표하며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자, KB부동산신탁 측 대리인단도 이를 등에 업고 반격에 나섰습니다. 최근 한국투자증권(소가 154억원) 및 메리츠증권(220억원)과의 재판에서 피고 측 대리인을 맡은 법무법인 태평양, YK, 율촌 등 변호인단은 "원리금 전액 배상은 무효"라는 방어선을 쳤습니다.
신탁사 법률대리인 측은 "인가받지 않은 보증보험업을 영위하거나 불법적인 신용공여를 하는 섀도우 뱅킹(그림자 금융)과 다를 바 없다"는 논리를 펴며, 원고(대주단) 측의 청구가 금융업법 체계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무리한 요구임을 부각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반면 대주단 측은 "계약서상 명시된 책임준공 확약은 금융기관 간의 엄연한 사적 계약이며, 이를 이행하지 못한 데 따른 배상 책임은 당연한 결과"라고 맞서고 있습니다. 대주단 측 법률대리인인 법무법인 광장과 바른 등은 "신탁사의 책임준공 확약이 없었다면 대규모 자금이 투입되는 PF 대출 자체가 성사되지 않았을 것"이라며 "신탁사가 스스로 부여한 신용 보강을 사후에 자본시장법 위반을 들먹이며 무효라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신의성실 원칙에 반하는 행위"라고 반박했습니다.
결국 법원이 '사적 계약 효력'을 우선시할지, 아니면 학계와 신탁업계 주장처럼 '금융법상 강행규정'을 우선할지에 따라 향후 부동산 PF 시장의 자금 조달 구조가 재편될 것으로 관측됩니다.
이재영 기자 leealive@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고재인 자본시장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