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박성원기자]"현금과 어음을 교환했는데, 어음이 부도났다."
지난 1998년 7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제2기 노사정위원회 책임전문위원으로 활동했던 학계 인사는 당시 재계에 대한 노동계의 인식을 이같이 설명했다. 재계의 요구대로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확보하기 위해 정리해고제도를 수용했지만, 실제로 노동계는 재계로부터 받은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는 '뒤통수를 맞았다'는 피해의식을 갖게 됐다고 봐야할 듯하다.
당시 노사정위원회에서는 단순히 임금과 고용에 대한 문제 뿐 아니라 재벌개혁, 공무원 노조 등에 대한 논의도 함께 진행됐다고 한다. 그러나 협의 과정에서 정부와 재계가 노동계를 고립시킨 채 형식적인 논의만을 거듭한다고 느낀 민주노총은 결국 1999년 노사정위원회를 박차고 나왔다.
당시 상황을 기억하고 있는 민주노총 관계자의 말은 더욱 적나라하다.
"100원짜리를 줬는데 5원짜리를 받았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협상의 핵심원칙인 '기브 앤 테이크(give & take)'가 처참히 무너졌다는 것이다. 이른바 '노사민정 대타협' 과정에 민주노총이 참여하지 않은 것 역시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그만큼 불신의 골이 깊기 때문일 터다.
불신이 불안의 옷을 입으면 화학적 결합이 일어난다. 노사민정 대타협의 최대 이슈로 떠오른 이른바 '잡셰어링(대졸 초임 삭감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을 두고 재계와 노동계가 갑론을박을 벌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민주노총이 불참의사를 밝히며 이번 합의에는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이 노동계 대표로 나섰지만, 여전히 '아인슈타인도 고민했다는 돈문제'를 두고 팽팽한 설전이 계속되는 상황이다.
상대적으로 온건하다고 평가받는 한국노총 역시 합의문 발표 이틀 만에 전격적으로 초임 삭감을 발표한 재계의 '드라이브'에 당혹감을 느끼는 듯하다. 기본적으로 신뢰가 돈독하지 않은 상황에서 향후 고용안정과 임금보장에 대한 논의를 기업별 노사간 협의 사항으로 미뤄버린 탓이다. 임금만 깎인 채 고용안정은 보장받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에 빠져들 만하다.
물론 국내 노동계, 특히 일부 대기업 생산직 노조는 국민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노조 가입률은 약 10% 수준. 사회적 대타협 모델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네덜란드의 노조 가입율이 약 80%에 이르는 것을 보면 대다수의 노동자들이 변변한 협상수단 없이 사용자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럼에도 '선택된 10%'에 속한 일부 강성노조는 파업을 일삼으며 노조 이기주의에 매몰됐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틈만나면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연대(連帶)"를 외치지만, 사실 이같은 구호는 '우리 조합원'에게만 해당하는 얘기다.
하지만 재계와 정부가 노동계의 불안감을 해소해줘야할 이유는 분명하다. 바세나르 협약 수준의 ‘사회적 대타협’은 언감생심 아직 먼 나라 얘기지만, 위기국면을 맞아 모처럼 노사정이 꿴 첫 단추를 다시 뜯어버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기 때문이다.
전경련은 ‘기브 앤 테이크’ 원칙에서 이번 합의문을 발표했다고 설명했다. 임금삭감을 받아들인 노동계는 반대급부로 고용안정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핵심은 실질적인 '교환'이 이뤄지는 것이다. 그러나 내줄 것은 내주고 받을 것은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일단 노동계에 심어주는 것도 필요하다. 노동계가 재계를 향한 의심어린 시선을 거두지 않는 한 '노사민정 대타협' 역시 10여년 전 노사정위원회의 파행을 재현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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