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 만에 농구월드컵 출전을 이룬 남자농구대표팀. 사진은 지난해 8월 모습. (사진제공=KBL)
[뉴스토마토 임정혁기자] 올 시즌 남자 농구대표팀은 농구월드컵(8월)과 인천아시안게임(9월)을 앞두고 있다.
농구월드컵은 16년 만에 세계무대 진출이다. 그동안 아시아 무대만 경험했던 한국 농구가 세계무대를 직접 몸으로 배울 기회다.
인천아시안게임은 금메달 가능성도 있다. 이 경우 선수들이 병역 면제혜택을 받는다. 신세대 스타 선수들이 군 문제를 해결할 경우 국내 프로농구 흥행에도 호재다.
농구계는 굵직한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한 단계 도약하려 한다.
그러나 바깥쪽에서 본 현실은 냉혹하다. 최근 국제대회는 커녕 아시아무대에서도 한국 농구는 위기다. 매번 높이 문제를 드러내며 힘겨운 승부를 펼쳤다.
"한발 더 뛰고 투지로 버틴다"는 식의 말은 구시대 유물이 됐다. 그 정도로는 극복할 수 없는 벽이 생겼다. 각국의 귀화선수 영입이 아시아 무대를 흔들고 있다.
지난해 대만과 필리핀은 각각 퀸시 데이비스(206cm)와 마커스 다우잇(211cm)을 귀화선수로 영입해 한국을 괴롭혔다. 윌리엄존스컵과 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에서 이들은 한 수 위의 기량을 선보였다. 골밑에서 귀화선수가 버티자 필리핀과 대만은 외곽 선수들의 슛 정확도까지 높아지는 효과를 봤다.
대표팀을 이끈 유재학 감독은 귀국 후 "한국도 이제 귀화선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후 귀화선수 문제가 급물살을 탔다. 8월에 이런 얘기가 나왔으니 이제 약 9개월이 흘렀다. 하지만 여전히 달라진 것은 없다.
프로농구 시즌이 끝난 최근에야 다시 귀화선수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농구팬들의 시선이 다가올 국제대회로 향했기 때문이다.
수준급 기량을 갖춘 새로운 선수를 물색하기는 시기적으로 늦었다. 선수의 의중도 파악해야 하고 법적인 절차도 있기 때문이다.
◇지난 시즌 서울 SK에서 뛴 애런 헤인즈. (사진제공=KBL)
이 가운데 지난 시즌 서울 SK에서 뛴 애런 헤인즈가 귀화할 것이란 소식이 잇따라 전해지고 있다. 201cm의 헤인즈는 높이보다는 안팎을 오가며 득점을 올리는 선수다. 2008~2009시즌부터 한국 농구를 경험했다. 일단 농구 하나만을 놓고 봤을 때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헤인즈가 귀화선수로 뛸 경우 상황은 복잡해진다. 여자 농구 앰버 해리스의 사례에서 보듯 그를 프로 무대에서도 국내선수로 인정할 것인지 외국인선수로 계속 둘 것인지 논의돼야 한다. 현재로선 그가 대표팀에 합류한다면 인천아시안게임이 끝난 이후 다시 외국인선수 신분으로 프로농구 새 시즌에 나설 전망이다.
팬들과 여론도 무시할 수 없다. 헤인즈는 지난 시즌 김민구(KCC)를 경기 도중 고의로 때려 호된 비판을 받았다. 이후에도 그의 반성하는 태도 등이 도마 위에 올랐다. 헤인즈가 사과 후 시즌 막판에 복귀했지만 원정경기 마다 그를 향한 야유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국제농구연맹(FIBA)은 대표팀에 귀화선수 1명만 뛸 수 있도록 제도화해 뒀다. 그만큼 최소한 아시아 무대에서 귀화선수는 당연한 흐름이 됐다.
한국도 이런 변화를 피할 수 없다. 과거 서장훈(207cm)과 김주성(205cm)이 골밑을 지키며 2002 부산아시안게임을 우승하던 영광은 보기 힘들 전망이다.
필리핀은 다음 귀화선수까지 계획하고 있다. 다우잇을 대체할 선수를 이미 선발했다. 미국 프로농구(NBA) 블루클린 네츠에서 뛰고 있는 안드레이 블라치를 귀화선수로 영입한다고 한다.
신장 211cm의 높이를 갖춘 그는 농구월드컵 이후 인천아시안게임까지 출전할 가능성도 있다. 이제는 NBA에서 뛰는 세계 최고 수준의 선수까지 국적을 바꿔 아시아 무대를 호령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귀화선수가 필요하다 아니다'보다는 '헤인즈냐 다른 선수냐'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는 이유다. 이미 귀화선수의 필요성 논의는 무의미해졌다.
과거 이승준(동부), 문태종(LG), 문태영(모비스)이 태극마크를 달거나 대표팀에 소집된 경우는 있다. 당시에도 다소 잡음이 있긴 했지만 크지 않았다. 특히 이들은 부모 둘 중 한 명이 한국인인 혼혈로서 한국인의 피가 흘렀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라는 주장이 흘러나오며 농구계는 그들의 대표팀 발탁을 지지했다.
반면 이번 헤인즈의 귀화선수 논의는 조금 다르다. 말 그대로 성적을 위해 미국인에게 농구대표팀 유니폼을 주는 경우다. 한발 더 나아갔다고도 볼 수 있다.
◇221cm의 압도적인 높이를 자랑하는 하승진. 사진은 2011~2012시즌 6강플레이오프 모비스와 경기 모습. (사진제공=KBL)
농구라는 종목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농구는 5명이 뛰며 신체조건의 영향이 크기 때문에 이런 얘기가 국제대회에서도 나오는 것이다. 아직 신체조건이 열악한 한국에겐 한계다.
다만 가능성도 볼 수는 있다. 수준급 선수 한 명을 키워낼 경우 충분히 아시아 무대를 호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장이 월등하거나 헤인즈처럼 기술이 엄청날 경우 말이다. 물론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했을 때다.
이렇듯 농구에서 귀화선수는 두 가지의 메시지를 동시에 던지고 있다. 이미 하나의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돼 '맞다, 틀리다'의 단계를 넘어섰다. 어떤 기량의 선수를 얼마나 투자해 데려오느냐 하는 문제만 남았다. "국제 무대의 프로농구화"라고 말해도 딱히 틀리지 않다.
어쩌다 한국은 귀화선수에 기댈 수밖에 없게 됐는지부터 과연 이 흐름을 피할 수는 없었는가 하는 생각까지 겹친다.
분명 한국도 221cm의 하승진이 2008년 프로 무대에 데뷔하며 세계 최장신 급의 선수를 갖기도 했다. 이외에도 205cm 이상의 선수들이 이따금 아마추어 무대에 나타나 관심이 쏠리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 이런저런 이유로 사라졌다. 관리와 지도력 부재를 배경으로 꼽을 수 있다.
프로농구 감독들이 이따금 "선수들 기본기가 너무 부실하다"고 토로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그토록 열망하던 '장신화'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다 날리고 그저 시대의 흐름에 빨려 들어간 것은 아닌지 안타깝다.
국제 대회는 계속 이어진다. 그때마다 없는 돈에 쇼핑하듯 이리저리 귀화선수 영입에 나선다면 모양새가 썩 좋진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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