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충무로에 위치한 샘표식품(007540) 본사 10층에는 주방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공간이 있다. 12명 가량이 요리 수업을 진행할 수 있도록 준비된 '지미원 강의실'이다. 이곳에서는 샘표 식문화연구소 '지미원' 소속 셰프들이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평소 맛 내기가 쉽지 않았던 한식에 대한 쿠킹클래스를 진행한다. 한식에 대한 보다 쉬운 접근과 깊은 맛을 내는 방법을 알려주는 일종의 소비자공헌 활동인 셈이다. 하지만 지미원의 본래 역할은 우리의 맛과 전통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한 연구다. 특히 한식의 강점인 '발효'를 기본으로 우리 전통의 맛과 건강을 생각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최신 연구설비를 기반으로 장을 연구하고, 다양한 발효음식 레시피를 개발해 실제 상품에 반영한다. 현재 지미원에는 셰프, 과학자, 영양학자 등 다방면의 전문가들이 한 데 모여 업무를 진행한다. 그리고 셰프 출신 이건호 지미원 원장이 이들을 이끌며 다양한 의견을 연구에 반영하고 있다. 대부분 10대부터 주방에 발을 들여놓는 요리사 지망생과는 달리 이건호 원장은 20대 초반의 나이에 입문한 '늦깎이 셰프'다. 하지만 그만의 독창적인 레시피와 플레이팅으로 굵직한 국가 행사를 진행하는 등 그 능력을 인정받고 있기도 하다. 이탈리아 요리를 먼저 접했으나 한식의 매력에 빠져 전향하는 등 이색 경력을 가지고 있는 그를 만나 살아온 길과 현재 우리 한식의 대한 생각, 한식 세계화 등에 대해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할머니와 아버지가 의상 소품 작품을 만들고 대여하는 일을 했습니다. 사극 드라마에 나오는 의상은 물론 칼이나 창, 사극소품을 만드셨죠. 저 역시 어린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의상 디자이너를 해보겠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 원장은 처음부터 셰프에 대한 꿈이 없었다. 그는 대학교 역시 디자인 관련 학과로 진학했지만 자신이 꿈꾸던 직업과는 괴리감이 있어 중도 포기하게 된다. 그때부터 군대에 입대하기 전까지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경험했다. 그 중 하나가 이탈리아 레스토랑이었다.
"입대 전까지는 단순한 주방 보조 아르바이트였습니다. 그런데 사장님이 좋게 봐주셨는지 군대를 다녀온 후 다시 찾아갔을 때 직원으로 채용해주셨죠. 하지만 역시 단순한 직장에 불과했습니다. 오히려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고 돈을 모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새벽에는 신문배달을, 저녁에는 포장마차를 운영해보기도 했죠."
이 원장은 27세 때 본격적으로 요리를 하겠다는 마음이 생겼다고 말했다. 지금의 성공한 스타 셰프들이 대부분 10대부터 요리에 입문한 것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늦은 셈이다.
"직장생활(레스토랑)을 계속하다 27살에 본격적으로 요리를 하겠다고 마음먹었고, 29살에 뒤늦게 전문대학교 조리학과에 들어갔습니다. 이후 4년제 대학으로 편입해서 총 6년을 내리 공부해 석사과정까지 이수했습니다. 할 수 있다는 의지만 있으면 나이가 중요하지는 않은 듯 합니다"
이 원장의 요리인생을 말하는 데 있어서 한식당 '시화담'을 빼놓을 수 없다. 시화담은 신선설농탕으로 유명한 한식 전문 외식기업 '쿠드'가 2011년 8월 국내에 첫 선을 보인 한정식 전문점이다.
"시화담이 생기기 직전 쿠드에서는 '수련한정식'이라는 한식 시범매장을 운영했습니다. 사실 2008년에 그곳에 입사할 때 요리를 잠시 쉬고 싶어 요리사가 아닌, 부점장으로 입사했어요. 그러다 회사가 선보일 새로운 한식 요리 개발로 진통을 겪고 있을 때 제가 요리사였다는 것을 알았던 임원진들이 다시 저를 시화담의 주방에 세우셨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요리사라는 직업이 제 운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원장이 업계의 주목을 받는 대표적인 이유는 접시 데코레이션 '카빙 플레이트' 때문이다. 그는 슈가파우더를 이용해 접시 위에 한 폭의 그림을 담아낸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기술이 유명해지면서 이 원장은 박근혜 대통령 취임 국빈만찬 행사의 총괄 진행을 맡는 등 승승장구하게 된다. 최근에는 카빙 플레이트가 국가기술자격증 항목으로 등록되기도 했다.
"2008년 오대산 월정사를 방문 했다가 기념품 가게에서 천에 새겨진 다양한 그림과 글귀를 보게 됐습니다. 펄럭이는 천들이 저에게는 접시로 보였죠. 고객의 얼굴이나 좋은 글귀를 접시에 담아서 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아할까 하는 마음에 그 길로 내려와 개발에 들어갔습니다."
이 원장은 고객이 자신의 얼굴이 그려진 접시를 보며 감동받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라고 설명한다. 기술을 넘어 마음을 손님에게 전달하는 것이 셰프의 가장 큰 임무라는 설명이다.
"요리의 기술이 단순한 기능적인 부분으로만 생각했다면, 이제는 그 속에 담긴 진실한 이유를 알아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코스의 첫 에피타이저를 담은 그릇에 자신의 얼굴이 들어 있다면 고객들은 모두 놀라죠. 그 때부터 긴장이 풀리며 고객들 간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형성되 즐거운 식사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이 원장은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근무하다가 한식 요리사로 입문하는 등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는 셰프다. 음식 공부를 할수록 한식의 매력을 발견하게 됐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 원장은 특히 한식의 세계화에 대해서도 충분이 경쟁력이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한식은 재료와의 궁합을 중시하며 먹는 사람의 건강을 배려한 음식입니다. 자연에서 얻는 산나물, 장류 등의 전통 음식으로 병을 치유하는 것으로 보면 약식 동원이라는 말이 실감나기도 하고요. 그러나 한식이 워낙 익숙한 음식이다 보니 가치를 제대로 인정 받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많은 젊은 셰프들이 이런 한식의 깊은 매력을 발견하게 되길 바랍니다."
하지만 이 원장은 현재 환경에서의 '한식 세계화'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한식을 전문적이고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교육기관이 거의 없어 본연의 매력을 전파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설명이다.
"예전보다 한식을 전문으로 하는 셰프가 늘어난 것은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한식 셰프라고 할만한 사람을 찾기는 힘든 것이 사실이죠. 지금 한식 조리과는 자격증 위주의 교육기관입니다. 전문적으로 한식만을 교육하는 기관은 전주에 위치한 국제한식조리학교가 거의 유일한 상황인데, 이같은 교육기관을 더 늘려야 합니다."
또 이 원장은 현재 도제식이고 폐쇄적인 한식 셰프들의 기술들에 대해 서로 공유하며 발전할 수 있는 문화와 자리가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식의 맛은 어머니의 수만큼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공유가 이뤄져야 한식 전체의 발전이 이뤄질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합니다. 외국의 경우 셰프들이 대규모 컨퍼런스를 개최하고 발표자로 나온 셰프들이 자신이 개발해 낸 요리 기술을 전부 공개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참여한 셰프들에게는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고, 발표자의 경우는 '밑천이 드러났으니 또다른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는 동기부여를 줍니다. '며느리도 몰라' 식의 폐쇄적인 문화에서 가장 절실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원장에게 요리 지망생과 후배 요리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물어봤다. 자신만의 차별화된 점을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야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요리도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고 내가 생각하는 것을 표현해야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면 모방에 불과하기 때문이죠. 전통요리는 당연히 지키면서 계승하되 자신만의 작품을 시도해 보는 것을 권하는 편입니다. 요리사는 인내의 시간이 대부분인 직업입니다. 절실하게 마음을 먹고 정진하다보면 차별화된 자신만의 요리를 만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이건호 샘표식품 지미원 원장 프로필
-1973년 10월 9일 출생
-우송대학교 외식조리학과 학사 졸업
-우송대학교 경영대학원 외식조리 석사 졸업
-모던 코리안 파인다이닝 '시화담' 총괄 셰프(2008~2013년)
-썬앳푸드 R&D팀 한식파트 팀장
-샘표식품 요리과학연구소 지미원 원장
-18대 박근혜 대통령 취임 국빈만찬, 리셉션 행사 총괄 진행
-서울국제요리대회 코스요리 부분 은상
-서울국제요리대회 조각개인부분 동상
이건호 샘표식품 지미원 원장이 '카빙플레이트' 기술을 선보이고 있다. 상단에 새겨진 '뉴스토마토' 문구가 인상적이다. (사진제공=샘표식품)
이철 기자 iron621@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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