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일호선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개강한지 한 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등굣길은 익숙하지가 않다. 학교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렇게 피곤할 수가 있다니.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소리를 위안 삼아 무거운 가방을 메고 덜컹거리는 지하철 속 몸을 싣는다. 그 때, 자리가 났다.
‘오 이게 웬 떡이지.’ 기쁜 마음으로 의자에 앉는다. 이와 동시에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는 이어폰 사이로 사람의 말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옆을 바라보니 옆자리에 계신 할아버지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어폰을 빼고 할아버지 말씀에 집중했다.
“대학생이야?”
“네~”
“아이고 내 손녀딸이랑 똑같이 생겨서 자꾸 쳐다봤어. 지금 내 손녀딸은 독일에 있는데 보고 싶어서 내가 이렇게 사진도 들고 다녀.”
“아 정말요?”
훈훈한 이야기가 오고가던 중, 할아버지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런데 이런 건 뭣하러 달고 다녀?”
내 가방에 달린 노란 리본이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당시 돌아가신 분들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달고 다녔던 그 노란 리본.
“그런거 달고 다니지 말어. 세월호니 뭐니 하는 것들. 지금 내 나이가 팔십인데~”
그렇게 시작한 할아버지의 잔소리 아닌 잔소리. 주요 골자는 이거였다.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니는 나는 ‘빨갱이’다! 옆을 바라보고 있던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렸다. 그리고 이어폰을 다시 귀에 꽂았다. 여전히 할아버지는 나를 향해 계속해서 열변을 토하고 계셨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가라앉았다. 가만히 있으라는 어른들의 말에 학생들은 가만히 있었고 이는 참사로 이어졌다. 이 후 세월호는 정치적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이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이 년 동안 세월호를 잊을 수 없었다. 정치적인 문제가 무엇이든 간에 적어도 나에게 세월호는 그런 의미다. 하지만 이 년이 흐른 지금까지 그들의 죽음을 추모하는 것을 ‘빨갱이’의 행동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애도의 마음은 무시당했고 왜곡됐다.
지난 25일, 또 사람이 죽었다. 지난 해 11월, 민중총궐기 도중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지 약 10개월만이다. 집회 도중 사람을 향해 물대포를 조준사격하고 이에 더해 쓰러진 사람을 태운 구급차를 향해서까지 물대포를 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죽음 이후, 죽음을 슬퍼하고 추모해야하는 자리엔 얼룩만이 가득하다. 유족들은 마음을 추스릴 시간도 없이 가족의 시신을 빼앗길까봐 밤새 눈을 뜨고 자리를 지켜야한다. 가족의 시신이 부검당하지 않기 위해 계속 싸워야만 한다. 사람이 죽었지만 그 곳에는 최소한의 예의도 공감도 추모도 없다. 국가권력이라는 이름 아래 억압과 통제만 있을 뿐, 정치적인 개입 이전에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태도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죽지 않아야 했던 사람이 죽었다. 그 사람의 죽음을 추모할 때 나는 ‘빨갱이’가 된다.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잊어가는 우리 사회가 나는 무섭고 슬프다.
사진/바람아시아
**이 기사는 <지속가능 청년협동조합 바람>의 대학생 기자단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젊은 기업가들(YeSS)>에서 산출하였습니다. 뉴스토마토 <Young & Trend>섹션과 YeSS의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asia)에 함께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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