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태극기 수난시대’이다. 3·1절 98주년인 2017년 3월1일의 모습은 아마 후대에 회자될만한 날로 남지 않을까 싶다. 친박집회의 태극기는 항상 성조기와 쌍둥이처럼 붙어 나와 시위를 구경하던 외국인들조차 의아해하고, 촛불집회의 3·1절 태극기는 전자의 전유물처럼 된 태극기와 구분하기 위해 깃봉에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을 달고 3·1절을 기념해야 했던 날. 이날이면 늘 하던 태극기 게양을 포기한 국민들이 적지 않고, 성조기 보이는 집회 분위기가 낯설어 외국이냐고 천진하게 묻는 어린이가 있다. 그리고 양쪽 집회로 친절히 안내하느라 고생하는 경찰들이 있다.
같은 나라, 먼 국민
3·1절에 이어 지난 4일 토요일에도 박근혜 대통령 탄핵찬반의 양 집회가 경찰의 차벽으로 나뉘어 열렸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결정이 임박해 오는지라 양측 국민들의 마음도 각각 다른 이유로 간절할 것이다. 지난 3월1일 채 50m도 되지 않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상반된 주장을 외치는 국민들 사이의 심리적 거리는 가늠할 수 없이 깊었다. 각자의 생각을 밝히고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이 무슨 문제이랴.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는 격려할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 해도 '대통령 탄핵 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이하 탄기국)의 집회에 쏟아지는 구호들은 너무나 섬뜩하다. '군대여 일어나라', '계엄을 선포하라'는 주장은 팻말뿐만 아니라 공공연히 연단에서 외쳐진다. “탄핵이 인용되면 그때는 폭동이 일어날 것이고, 우리가 혁명 주체세력이 될 것”(1월 21일, 정광용 탄기국 대변인 겸 ‘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 회장)이라는 연설이나, 계엄령을 선포하고 ‘빨갱이들을 걸리는 대로 다 죽여야 한다’(1월 21일, 일간베스트저장소 승려 성호, 그가 연단에 들고 나오는 십자군 방패를 본뜬 팻말에는 ‘빨갱이는 죽여도 돼’라는 문구와 태극기·성조기가 그려져 있다)라는 선동도 따지자면 ’내란선동죄‘(형법 제90조 제2항)에 해당될 것이나 일단 ’표현의 자유‘를 고려하기로 하자. ‘헌재 재판관 8명, 7명이 결정하면 내란으로 들어간다’(2월 22일, 김평우 변호사)라고, 재판관이 아니라 심판정의 방청석과 녹화카메라를 향해 변론을 하는 대통령 대리인이 직접적으로 ‘내란’ 운운 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다음의 시는, 친박·탄핵반대 집회에 군복을 입고 나오는 육사·해병대 출신들, 박정희·박근혜의 사진을 들고 나오거나 태극기·성조기를 흔들며 자신과 생각이 다른 모든 이들을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2017년도의 이들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여전히 현실적이다.
< … >
자색 구두만 신어도
너 빨갱이지 하고
사찰계 형사가 연행하던 시절
어쩌다 붉은 꽃 어쩌구 노래해도
너 빨갱이지 하고 조사하던 시절 지나
그 50년대 후반 지나
60년대
70년대에도
숫제 그런 반공은 사라질 줄 몰라
자유라는
무서운 근원의 가치가
다만 자색 구두 반공의 의미였으므로
제 노선과 조금만 맞지 않으면
마구 조져대어
온갖 중상을 다 해도 부족해 마지않았다
< … >
(‘박도연’, 11권)
제98회 3·1절 오전 서울 중구 세종대로 일대에서 '탄핵기각을위한국민총궐기운동본부(탄기국)' 주최로 박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가 열리고 있다. 사진/뉴시스
70년대 개신교의 두 모습 ― 유신정권 부역자 vs. 산업선교회
3월1일 대립적인 집회 현장의 상황은 필자에게 우리의 과거를 상기시키는 두 가지의 인상을 남겼다. 첫째, 광화문광장에 탄기국이 미리 설치한 대형전광판에서 흘러나오는 탄기국의 집회 소리가 촛불집회 내내 굉음으로 울려 퍼졌는데, 이 조직적인 방해가 마치 전방에서 남북한 사이에 벌어지던 대남·대북 확성기 방송을 연상시켰다는 점이다. 이 굉음은 촛불집회 측의 소리를 삼켜버릴 정도로 커서 광화문광장의 중간부터는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본의 아니게 탄기국집회를 관람하며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나 “빨간 마후라는”으로 시작하는 군가를 듣게 되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거의 90세가 다 되신 이용수 할머니(1928년 생)가 촛불집회 연단에 서서 한일 '위안부' 합의의 부당성에 대해 발언하실 때도 탄기국의 전광판에서는 “아아 우리 대한민국” 노래가 더 크게 울려 퍼지고, 곧이어 “종북 좌파” 운운하는 탄기국집회 사회자의 발언이 뒤섞인 속에 할머니께서 <아리랑>을 부르시기 시작했는데, 이 <아리랑>을 따라 부르는 사람들의 마음이 여러모로 착잡하지 않았을까.
둘째는, 이날 탄기국의 본집회에 앞서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와 한국교회연합(한교연)이 공동주최한 ‘3·1 만세운동 구국기도회’가 오전 11시 광화문 사거리에서 열렸다는 점이다. 이 기도회에 단체로 참석한 대형교회의 신도들 역시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나왔는데, 그들과 그들을 이끄는 목사들의 교회·소속 조직들을 보면서 70년대 박정희 정권이 행한 ‘도시산업선교회’의 탄압에 일조했던 개신교 보수(또는 극우)세력을 떠올리게 된다.
개신교의 ‘산업선교회’는 천주교의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JOC)’와 더불어 한국 노동운동의 초석을 깔았다고 할 수 있다. 1960년대 복음의 전파에 주력하던 ‘산업전도’가 70년대에 들어서 열악한 노동환경과 노동조건 속에 있는 노동자들을 위해 활동하는 ‘산업선교’로 발전한다. 산업선교회(이하 산선)는 소그룹활동을 통해 노동자들의 의식을 교육하고 노동운동을 지원해 나갔다. 사측의 어용노조에 맞서 노동자 자신의 이해를 대변하는 민주노조의 싹을 피운 것도 산선의 공로이다. 노동운동을 억제해야 했던 박정희 정권은 개신교의 산선을 다른 쪽, 즉 개신교 보수세력을 이용해 탄압하려고 시도한다. 이는, 당시에 한국 개신교가 반공을 강하게 표방하고 있던 데다가, 산선이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지원을 받고 있어 정부가 직접 나서서 산선을 ‘용공’으로 몰아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이하, 다음을 참조: 장숙경, “유신후기 정권의 교회단체에 대한 통제정책: 산업선교회를 중심으로”, <사학연구> 제95호, 2009.9, 177~223쪽). 유신정권과 개신교 보수세력의 지원을 받아, 신학의 논리로 산선을 ‘빨갱이’로 몰아가는 글을 숱하게 쓴 이가 홍지영이라는 인물인데, <만인보>는 그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본명 홍성문
그는 극우반공의 필봉으로 이름을 내걸었다
그의 맹렬한 우국충정
< … >
온건 사회주의도
사회민주주의도
중도좌파도 마구잡이 질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직 주사파나 PD 따위 대립되지 않은 시절
그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은 의혹의 대상이었다
아니 심증
아니 물증으로까지 끌어올리는 대상이었다
함석헌도 누구도
박정희 정권에 맞선 자들
십자가도 무엇도 빨갱이 광대였다
반공의 광장은 늘 확성기 대가리가 컸다
그 광장 한구석의 출구 열리면
마구 달려나오는 그의 필봉 대가리가 컸다
70년대 관변의 분단 주리설(主理說)이 떼굴떼굴 굴러갔다
(‘홍지영’, 14권)
이 자는 직함에 따라 이름이 달라진다. 이를테면, 한국종교문제연구회 회장 홍지영, 내외정책연구소 연구위원 홍성문, 잡지 <현대사조>의 주간 홍성철 등이 그것이다. 그는 정권과 개신교 보수세력·기독실업인들이 공조해 만든 이 잡지에 매회 글을 써서 에큐메니칼 운동(Ecumenism, 교파를 초월한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추구)의 본산인 세계교회협의회(WCC)와 이를 따르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 산업선교를 용공으로 공격했다. 1976년 산선을 최초로 공격한 책자 <한국기독교와 공산주의>는 그를 포함해 10명의―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은―‘기독교적 반공동지’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밖에도 그가 쓴 많은 글들, 특히 <산업선교는 무엇을 노리나?>(1977) 같은 글이 교회와 기업체에 대규모로 배포되어 산선을 ‘빨갱이’로 매도했다.
지난 1일 서울 종로구 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이용수 위안부 피해 할머니가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산업선교, 낮은 곳으로 임하다
본 연재의 7회와 14회에서 도시산업선교회의 활동가들이 몇몇 언급된 적이 있는데,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과 함께 한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의 조화순 목사, 역시 인천산선의 조지 오글 목사 등이 그들이다. 영등포산선의 조지송 목사는 오글 목사에 관한 시에서 잠시 등장했는데, 이제 그에 대한 시를 여기에 소개한다.
서울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를 연 사람
시민아파트 밑층 빌려
교회가 목적이냐
노동자가 목적이냐
그것을 따지지 말아라
공장 처녀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부드럽고 허약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의 하루는 굳센 하루
권력과 싸워
노동자들의 교회를 지켰다
빨갱이다 빨갱이다 하고 몰려와도
그는 그의 뜻을 저버리지 않고
공장 처녀들의 꿈을 저버리지 않았다
한 해 한번쯤 외국 지원기관의 목사가 오면
그 목사가 투숙한 호텔에 드나드는 것
영 어색하였다
호텔 수위가 그를 막았다 < … >
말소리 속삭이는 듯
걸음걸이 서두를 줄 모르는 심심파적인 듯
그의 허술한 잠바 입은 가슴속 깊이 박힌 의지가
겉으로 나오기까지는
언제나 쓸쓸하다
(‘조지송’, 11권)
산선에 대한 탄압은 70년대 내내 계속되어 많은 노동자들과 산선 실무자들이 연행·구속되었다. 1978년 2월 동일방직 인분투척사건이 일어나자, 신·구교 산업선교 실무자들로 구성된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는 3월 금식기도에 들어가 동일방직 노조파괴행위를 규탄하고 산업선교대책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동일방직의 민주노조 파괴공작과 이 민주노조를 지원해 온 인천산선에 대한 탄압은 동일선상의 문제였다. 예장청년회전국연합회와 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가 성명서를 발표하고 NCC는 5월에 ’산업사회선교대책협의회‘를 개최하는 등 저항을 계속하지만, 정권의 탄압은 더욱 거세어져 이번에는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영산) 총무인 인명진 목사를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1978년 5월 1일에 구속한다. 그가 4월 17일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주최로 진행된 기도회에서 인용한 성경구절을 문제로 삼은 것이다. 민주화운동으로 유명한 갈릴리교회 출신이자 도시산업선교회 활동가로 오랫동안 일하고 여러 차례 투옥되기도 했던 그의 과거경력을 감안해 볼 때, 2016년 12월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의 비상대책위원장직을 수락한 그를 보고 주위에서 당혹스러워 한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만인보>에 등장하는 그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 / 그 시절 / 정권이 퍼뜨렸지 / 도산(都産)이 가면 도산(倒産)한다고 / 그 영등포 도산에 / 메기입 험한 소리 / 마구 튀어나오는 인명진 있다 / 조지송은 조용한데 / 인명진은 문 탁 닫는다”(‘인명진’, 12권).
1976년부터 영산을 돕던 호주인 선교사 라벤더도 1978년 6월17일 추방되고 영산에 대한 탄압이 극심해지지만, ‘성경구절’을 문제시했다는 것은 감히 성서를 심판한 것이기에 개신교 내부의 반발을 사게 된다. 결국 1978년 7월8일 150여명의 예장 목사를 중심으로 ‘예장산업선교수호위원회’(위원장: 차관영 목사)가 결성되고 교단 차원(예장통합총회)에서 대처해 인명진 목사가 11월 1일에 석방된다. 그러나 이는 산선과 총회 보수세력 간의 갈등이 해소되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청주 도시산업선교회의 고(故) 정진동 목사(1932~2007)를 소개한다. 그는 영산의 조지송 목사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청주지역의 노동자와 도시빈민을 위해 크고 작은 모든 투쟁에 참여한 분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산선의 투쟁을 돕던 장남 법영 군(당시 19세)까지 의문사로 잃는 아픔을 겪었다. 2005년 1월 뇌졸중으로 갑자기 쓰러졌다가 깨어났을 때 그가 처음 한 말은 “나에게 아직 통일을 위해 할 일이 남아 있다”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평생 기층민중과 더불어 산 그의 영전에 고은 시인의 시를 바친다.
청주에 가면
숙명으로 사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도시산업선교회 목사 정진동 있다
제아무리 탄압과 핍박이어도
도리어 두더지처럼
땅속을 뚫고
저만치 가서 우뚝 서 있다
청주 시외의 농민들
청주공단의 노동자들
그들의 억울한 것 대신하는 동안
끝내 아들 법영군까지 희생되었다
청주에 가면
숙명에 앞서
천명으로 사는 정진동 있다
칼 없이
총 없이 추위에 튼 맨주먹 쥐고 서 있다
그 굶은 듯한 두 눈
그 두꺼운 입
그 에돌아가는 말
그러나
그 지루한 여름날 땡볕 오십릿길 같은
변함없는 신념
< … >
(‘청주 정진동’, 13권)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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