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준 낮은 내용과 문제 있는 형식으로 많은 국민들을 실망시킨 대선후보 2차 TV토론은 ‘단지 서 있어서 스탠딩’ 토론이 되어버린 우스꽝스러운 연출과 함께 구태의연한 색깔론·사상검증이 되풀이되었다. 그 중 가장 이슈가 된 것은 아마도 ‘북한 주적론’일 것이다. 한편,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두 발언―미국 항공모함 칼빈슨호의 한반도 이동에 대한 거짓말 논란과 시진핑 중국 주석이 회담 중 말했다는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에 대한 전언―은 대한민국이 과연 주권국가인가를 의심케 한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정부는 4월 20일 미군에게 사드 부지를 공여해 그 땅에 대한 모든 권리를 이양했다.
‘경계인’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
남과 북에 단독정부가 들어선 지 내년이면 70년이 되건만, 전 세계 200여 개국들 중 바로 옆의 같은 민족을 두고 아직도 여전히 ‘주적’ 논란을 펼치는 이들의 답보적인―시대의 변화를 감안한다면 상당히 퇴보적인―사고가 놀랍다. ‘레드 콤플렉스’의 개념을 책이나 인터넷에서 배운 젊은이들이 촛불집회에 나갔다가 ‘빨갱이’ 소리를 듣고 당황해하는 경우도 있다.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정체성’을 강요받는 순간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 많은 간첩사건들을 고안해낸 국가보안법은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존속되어 이런저런 사건들을 만들어냈는데, 그 피해자들 중 한 명인 재독사회학자 송두율 교수는 자신을 ‘경계인’이라 칭했다. 그의 철학적 사유에 의하면, ‘경계인’이란 서로를 배제하며 갈등 구조 속에 있는 양자 사이를 중재하는 제3자이다. 이 경계인은 서로 대립하는 세계들이 소통하고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틈’, ‘경계선’이 아닌 ‘경계면’을 꿈꾼다. 그러나 1970년대 독일에서 반유신운동을 한 ‘반체제 인물’이자 북한을 방문한 ‘친북 인사’로 분류된 그는, 2003년 9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초청으로 37년 만에 귀국했다가 간첩혐의로 국정원의 조사를 받게 된다. 2004년 3월 1심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았으나 7월의 2심에서 일부 무죄 및 집행유예를 선고받아 독일로 돌아간 그에게 2008년 대법원은 그가 독일 국적을 취득하기 전에 했던 방북 행적을 제외하고는 무죄를 확정·판결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남쪽의 땅도, 북쪽의 땅도 밟지 않았다.
송두율 교수가 지향한 ‘경계인’의 긍정적 의미와 역할과는 달리, 한국사회에서 경계인들이 설 자리를 찾기는 대단히 어렵다. 사실 어느 나라에서든, 디아스포라를 이루고 살아가는 타국인들은 늘 정체성 문제에 봉착하기 마련이지만, 자국·타국의 차원뿐만 아니라 남북으로 갈라진 조국의 역사 속에서, ‘주적’이라 여기며 물고 뜯는 양측의 정권들과 그 양자를 활용하는 주변 강대국들의 세력싸움 속에서, 이데올로기의 희생자가 되어온 이들은 양쪽 국민들일 뿐이다. 한국전쟁을 체험한 이들일수록 공포와 집단적 피해의식이 온몸에 각인되어 있어 국가보안법 철폐가 얘기되면 불안해하고, 미국의 ‘보호’가 없어지면 핵실험을 하는 북한이 금방이라도 쳐들어올 것 같은 두려움을 느낀다. 이들에게 국내외 권력자들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전쟁위기감을 조성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식민지·분단·전쟁이라는 비극적 시기를 겪어온 한국사는 경계인들을 낳았으나, 그 경계인들은 대립하는 세계들 사이에서 평화공존의 틈을 제공하는 역할이 아니라 남이냐 북이냐, 흑이냐 백이냐의 선택을 강요받았고 심지어 한쪽을 선택했어도 권력자들의 필요에 따라 제거되었다. 여기에 그 대표적인 인물, 앨리스 현이 있다.
'경계인'을 자청해 온 재독 사회학자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턴대 교수와 그의 부인 정정희씨. 사진/뉴시스
경계인인가 이방인인가
송두율 교수가 말한 ‘경계인(border rider)’은 어느 한쪽의 이데올로기를 택하지 않고 이데올로기의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이지만, 다른 의미에서 경계인은 종종, 이질적인 사회들에 동시에 속하지만 결국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존재, 즉 ‘주변인(marginal man)’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한반도의 굴곡진 역사와 시대가 낳은 경계인으로, 남한·북한·미국·중국·체코를 돌아다니며 치열한 사회적 삶을 살았으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사라져버린 앨리스 현의 흔적을 한 역사학자가 오랜 시간의 추적 끝에 몇 년 전부터 연구논문과 단행본으로 일반에게 알려오고 있다(정병준 지음,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 : 역사에 휩쓸려간 비극의 경계인>, 돌베개, 2015). 이 여성은 <만인보>에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녀의 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라
뭇 사나이들 머릿속 어지러웠다
가슴속 너울 일렁거렸다
1903년생
식민지시대
분단시대
미국
중국
남한과 북한
체코 등지를 망라
지치지 않는 스파이의 삶을 살았다
1910년 상하이에서는
여운형
박헌영의 친구였다
상하이 임시정부 설립 공로자
현순 목사의 딸
하와이에서 태어난 첫 시민권자 앨리스 현
컬럼비아대 졸업
아버지의 뜻에 따라
미국 CIA 요원
앨리스와
그의 아우 피터 현
데이비드 현
세 남매는
1945년 매카서 사령관 비서였다
1949년
체코 경유
북한으로 들어가
박헌영과 합류
그녀는 미국 스파이였으므로
평양에서 처형된다
아름다운 여인이다
< … >
뭇 사나이들
그 매혹에 오만에 빠져들어 헤어날 수 없었다
(‘앨리스 현’, 19권)
이 시가 실린 <만인보> 19권의 초판이 2004년에 간행되었으니 정병준 교수의 연구들이 발표되기 전이라 시인이 제공한 정보에는 당시 잘못 알려져 있던 오류가 꽤 포함되어 있다(이는 앨리스 현에 대해 언급한 최종현·김창희의 공동 저서 <오래된 서울>(디자인커서, 2013)에도 지적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사안이 앨리스 현을―당시 일반적으로 인식되던 바와 같이―미국 스파이로 간주한 것인데, 정병준 교수는 자신의 연구를 통해 이를 부정하고 정정하려 한다.
앨리스 현(한국명 현미옥, 1903~1956?)의 아버지 현순 목사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내무부 차장, 구미위원부 위원장을 지냈고 미주한인민족운동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8남매 중 맏딸인 그녀가 하와이에서 태어난 것은 현순 목사가 1903년 두 번째 하와이행 이민이 실시될 때 통역으로 따라갔기 때문인데, 당시 임신 중이던 그의 아내도 동행해 앨리스 현을 그곳에서 낳게 된다. 이후 그들은 1907년에 귀국했다. 현순 목사는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그 직전 상하이로 망명했는데, 이화고녀를 마치고 이화여대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진 앨리스 현은 1920년 가족과 함께 아버지를 찾아 상하이로 떠나게 된다. 그녀는 상하이 시절 그녀의 집안과 친하게 지내던 박헌영을 알게 되고 이 인연은 후일 북한에서 박헌영이 미국의 간첩으로 숙청당할 때 미군에서 일한 적이 있는 그녀가 얽히게 된 계기를 낳았다.
1920~1921년 상하이, 일본에서 공부하던 앨리스 현은 거창의 대지주 집안 출신인 재일유학생 정준과 1922년에 결혼했으나 결국 이혼하고 하와이로 돌아와 아들 웰링턴 정을 낳았다. 1930년대에 뉴욕시립대학(CUNY) 산하 헌터 칼리지(Hunter College)에서 수학한 그녀는 이후 하와이로 돌아가, 역시 뉴욕에서 생활했던 동생 피터 현과 함께 미국공산당 하와이 지부에서 활동하며 노동조합운동에 관여하였다. 그녀는 1943년 9월 이후 항일전의 일환으로 미 육군의 정보관계기관에서 근무했으며, 해방 후에는 맥아더 사령부 연합통역번역대 민간통신검열단의 군무원으로 배속되어 귀국해 근무를 하게 된다. 이 당시 미군 내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활동했다는 이유로 1946년 미군 방첩대(CIC)에 의해 미국으로 추방당한 그녀는 미국에서 다시 아버지, 동생 피터와 함께 신문 <독립>을 발행하고 ‘재미조선인민주전선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1947년 말 재미한인좌파의 미국 내 입지가 현저히 축소되고 기존의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1949년 체코에서의 체류를 거쳐 북한에 입국하게 된다. 북한이 혁명의 이념을 실현할 조국이라고 생각해 스스로의 의지로 찾아갔던 그 ’조국‘은 그러나 그녀를 배신하고 남로당 계열을 숙청할 때 그녀에게 ’미국의 스파이‘라는 오명을 씌워버리고 말았다.
앨리스 현과 박헌영
앨리스 현에 관한 시가 <만인보>에 쓰이던 당시 그녀에 대해 남한에 알려진 이미지는 ‘박헌영의 첫 애인’, ‘한국판 마타하리’ 같은 식이었다. 그러나 정병준 교수가 밝혀낸 바에 의하면, 그것은 부당한 표현들이다. 이승만을 지지하던 현순 목사는 그와 대립하게 된 이후 상하이의 이르쿠츠크파 사회주의그룹에 관여하는데, 그 덕분에 당시 이르쿠츠크파 청년그룹의 대표였던 박헌영이 현순의 가족들과 친해져 앨리스 현, 피터 현과도 가까워지게 된다. 피터 현은 박헌영이 지도하던 상하이 소년혁명단의 단원이 되기도 했다.
한밤중 눈뜨고 잠든 사람
그의 얼굴은 언제나 가면이었다
둥근 안경조차도
조직의 천재
음모와 지령의 천재였으나
남에서 실패하고
북에서 실패했다
테제의 고독
때로는 자칭 정신이상자였고
때로는 벽돌공
때로는 김가였고 장가였고 오가였다
때로는 후보당원이었고
때로는 관 속의 송장
관 속의 송장으로 북으로 갔다
오직 위장만이 삶이었다
조선 공산주의운동의 종합이었고 종말이었다
슬퍼라
20세기 전반 조선은 스파이로 내몰린 혁명가가 있어야 했다
< … >
(‘박헌영’, 20권)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원동피압박민족대회’가 열렸을 때 현순도 박헌영·여운형·김규식·이동휘 등과 함께 참석하였는데, 중국에서 몽골로, 몽골에서 러시아로 한겨울 추위를 뚫고 자동차와 마차, 열차를 갈아타가며 이 대회로 가는 여정은 멀고 길었다. <만인보>는 이 여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1921년 미국 워싱턴에서 태평양회의가 열렸다
이에 맞서
소련 모스끄바에서는
레닌 주도의 동방피압박자대회가 열리게 되었다
상해 임정은 파벌로 정체되었다
이 정체 벗어나기 위해
일부는 하얼삔에서 씨베리아 철도 탔는데
여운형 김규식 등은
중국 북경 장가구에서
몽골 고륜
소련 국경 캬흐타에 도착
< … >
소총과 권총을 마련했다
10여일 걸려 몽골사막 횡단
영하 20도
사막 복판의 야영 거듭하다 먼 목적지에 다다랐다
가다가 양을 잡아
휘발유통 솥에 국을 끓이니
소금 없이도 성찬
소몽 구경
삽스끄
우딘스끄 경유
언 흑빵 도기로 쪼개어먹으며
이르꾸쯔끄
모스끄바 다다랐다 1922년 1월 7일
< … >
(‘대륙의 10일’, 19권)
앨리스 현, 그리고 그녀와 사상을 공유하며 상하이·뉴욕·하와이·서울 등지에서 함께 활동했던 동생 피터 현, 그들의 정신과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재미한인민족운동을 이끌었던 아버지 현순, 이들의 파란만장한 가족사에는 한반도의 비극적 역사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앨리스 현이 박헌영 사건에 연루되어 북한에서 미국의 스파이로 몰렸을 때 그녀의 두 동생 피터와 데이비드는 공산주의자이자 소련·중국의 간첩이라는 혐의로 미국에서 조사를 받았고 추방당할 위협을 오랫동안 안고 살았다. 더욱 비극적인 사실은, 체코에서 의사로 일하던 앨리스 현의 아들 웰링턴 정이 북한으로부터는 입국을 거부당하고 미국으로부터는 시민권을 빼앗긴 채 체코 정부의 감시를 받다가 결국 아내와 자식을 두고 1963년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어느 곳에서도 환대를 받지 못한 채 냉전시대의 희생물이 되어버린 이 경계인들에게 잘못이 있다면 조국과 민족을 사랑했다는 것뿐이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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