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15인의 역대 최다 후보 그리고 5인의 주 후보들이 표를 나눠 가져간 대선에서 41.08%의 득표율로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은 5월12일 한 여론조사기관이 발표한 국정수행 지지도 조사에서 ‘잘 할 것이다’라는 의견을 74.1% 획득했다. 단 며칠 동안임에도 불구하고 속도감 있게 진행된 새 대통령의 ‘나라 바로 잡기’ 행보를 본 많은 국민들은 매일 쏟아지는 신선한 뉴스에 즐거움을 감추지 않고 있다. 이제 며칠 후 광주 5·18기념식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대통령과 함께 9년 만에 제창될 것이다. 부디 국민과 더불어 새 정부의 개혁 의지가 모든 방해물로부터 끝까지 지켜지기를.
2030년 어떤 대통령
<만인보>의 광주민중항쟁 시편들(27-30권)에 등장하는 많은 희생자들은 너무 빨리, 너무나도 어이없이 1980년에 마감된 자신의 삶을 시인에 의해 되돌려 받는다. 학살당하지 않았다면 원래 살았을 삶을 더 살아 아마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으며 백발이 되어갔을 그들 중, 고은 시인이 부활시킨 가장 어린 존재는 만삭의 어머니와 함께 죽어간 태아이다. 1980년 당시 전남고등학교 영어교사 김충희의 아내로 둘째를 임신한 지 8개월째이던 고(故) 최미애(1957~1980) 씨는, 그의 어머니 김현녀 씨의 증언에 의하면, 5월21일 학생들을 돌보기 위해 시내로 간 남편을 마중하려고 전남대 앞에 위치한 자신의 집 밖으로 나갔다가 총을 맞게 되는데, 그때 그녀가 놀라서 보고 있던 장면은 계엄군이 한 학생에게 총을 쏘아 두 다리를 질질 끌어가고 머리는 시멘트 바닥에 끌려가는 모습이었다. 죽어가는 엄마의 뱃속에서 살려고 펄떡펄떡 요동치던 아기를, 현실에서는―이를 본 외할머니가 여러 병원에 연락했으나 아무도 오지 않아 결국 엄마와 함께―리어카에 실려 교도소 건너편의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그 후 부검을 위해 다시 꺼내졌다가 마침내 망월동에 안장될 그 태아를, <만인보>의 시인은 다음과 같이 살려내고야 만다.
1980년 5월 어느날 애저녁
임신 태아
임산부 총 맞아 죽으니
조금 뒤
태아도 죽었다
그 태아가 살아 있다면
50년 뒤
2030년 5월 어느날 애저녁
고향 광주에 왔다 팡파르가 기다린다
전남대 정문 앞거리에서
그 거리
사뭇 달라진 그 거리에서
50년 전 엄마의 뱃속에서 죽었던 사실 통 모르고
그 거리에서
전남대생들의 환영 팡파르가 뜨겁다
모교 기념강연
한국 역대 대통령 중
최연소 대통령
50세 대통령으로 와서
왜 자유는 피를 먹어야 하나
특별강연 ‘성장과 복지’ 첫머리부터
이런 난데없는 질문을
청중의 침묵 속에 던졌다
아무도 그가
50년 전
엄마의 뱃속에서 죽은
여덟 달짜리 태아인 줄 몰랐다
그 태아가
죽은 엄마의 몸 부검으로 나와서
기적으로 이적으로 살아 나와서
외할머니를 엄마로 삼고 자라 팔삭둥이로 자라
10년 학문 10년 정치로
벼락쳐 대통령이 된 지난날 아무도 몰랐다
< … >
환영만찬 끝
한 동문회 간부가 말했다
각하!
각하의 자당 최미애의 산소를 저는 알고 있습니다 망월동 산소 말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2030년 5월’, 30권)
“그 태아가 살아 있다면”이라는 가정법은 시인에 의해 현실로 실현되어 “50년 뒤 / 2030년 5월 어느날 애저녁 / 고향 광주에 왔다“라는 과거형과 그를 ”팡파르가 기다린다“는 현재형의 직설법으로 변이된다. 가정과 실제, 과거·현재·미래의 경계를 허물어 이승의 빛을 보지 못한 채 소멸한 태아에게 시인은 이승의 새로운 삶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그 생명으로 하여금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새 시대의 젊은 대통령으로 성장할 기회를 제공한다. 1980년 5월의 광주가 2030년 즈음에는 역사적으로 치유되어 있기를 소망하는 시인의 마음이 이 시의 마지막 구절, 그가 상상해 낸 미래 시대 지도자의 반문에 스며있는 것은 아닐는지.
1980년 어떤 소년
광주항쟁 당시 시민군의 다수를 차지했고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했던 이들은 주로 ‘도시하층민’이라 불리던 일용직 노동자, 구두닦이, 넝마주이, 무직자 등이었다. 공사판 막일꾼, 타일공, 용접공, 식당종업원, 재수생 등등과 함께 ‘폭도’로 매도되었을 뿐만 아니라 후에 ‘북한군 간첩’ 운운하는 누명까지 들어야 했던 무등갱생원의 소년들도 있다. “수습위 인사들이 / 무기반납을 결의하자 / 선생들만 애국자요 / 우리도 애국 한번 해봅시다 무기반납 못하겠소”(‘무등갱생원생’, 28권) 하며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던 이들의 죽음은 아직도 역사 속에 억울하게 묻혀 있다. 그리고 여기, 망월동에 묻혔으나 ‘고아’라는 이유로 15년 동안 정부의 외면을 받았던 한 구두닦이 소년이 있다.
누구냐고요? 내가 누구냐고요?
어디서 태어났느냐고요?
부모는 누구냐고요?
성은 무엇이냐고요?
몰라요
< … >
열세살 때인가
서울 녹번동 / 시립아동보호소
그 감옥에서 도망쳐나왔어요
무턱대고 / 남행열차 탔어요
< … >
남광주역 / 거기가 좋았어요
대합실 걸상에서 자고
역전에서 / 한푼 두푼 타내었어요
< … >
그러다가 술꾼 꺽쇠어른한테 끌려가
껌을 팔았어요
껌팔이로 시내 떠도는데
누군가가 / 너 이리로 와보아 해서
따라간 데가 / 방림동
소년재활원이었어요
형과 아우들이 있었어요
50여명이었어요
거기서 새 삶의 구두닦이가 되었어요
열여덟살의 그해 5월
구두 닦다가
계엄군이 무고한 시민들
무참하게 패대는 것 보고 가슴에 생불이 났어요
재활원 친구들과
시위행렬에 달려갔어요
광주고교 앞에서 내가 죽었어요
< … >
목에 총 맞은 내 주검이야
이미 망월동에 실려가
비닐 싸인 채 묻혔어요
내 이름은 김재형이어요
원장님이 지어주신 이름이어요
내가 누구냐고요? 누구냐고요?
(‘열여덟살’, 27권)
그해 5월20일, 18세의 나이로 사망한 김재형(1962~1980) 군은 광주고등학교 앞에서 총을 맞았다. 13살이던 1975년 서울시립아동보호소를 뛰쳐나와 남광주역에서 껌을 팔며 구걸하던 그를 발견해 방림동의 소년자활원―특정 자료와 앞의 시에는 ’재활원’으로 되어 있으나―으로 데려왔던 자활(自活)원 원장 오종열 씨의 증언에 의하면, 소년은 성실하고 남에게 잘 베푸는 성격이었으며 친구들도 많았다고 한다. 20일 밤 11시40분경 재형이의 총상 소식을 들은 오원장 부부와 박봉기 사감이 21일 날이 밝자마자 광주고등학교로, 상무관·도청·전대병원·기독교병원·적십자병원으로 돌아다니며 여러 날 그를 찾았으나, 결국 28일에서야 망월동에 재형이가 있으니 옷과 소지품, 사진을 확인하라는 경찰서의 통지를 받고 망월동에 가 비닐에 싸여 있는 시신을 확인하게 된다. 사망자 신청을 했으나 재형이의 친부도, 법적 보호자도 아니라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하던 오 원장은 이후 유족회 활동을 하면서 많은 탄압을 받았고 자활원은 문을 닫게 된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는 김재형의 특별보호자로서, 그가 공익사업을 한다는 점을 고려한 정부로부터 뒤늦은 보상금을 받아 무고하게 희생된 소년의 죽음을 기릴 수 있게 됐다.
1980년 5월21일 광주 동구 금남로를 가득 메운 시민들. 이날 계엄군은 집단발포를 자행, 수없이 많은 시민들이 쓰러졌으며 항쟁기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다. 사진/뉴시스
어떤 시민군의 보람
낮은 곳에 있던 사람들, 소외되고 외면당하던 그들이 시민군이 되어 함께 싸우고 하나의 공동체가 됐을 때 느낀 심정이 한 시민군의 고백 속에 담겨 있다. 가난으로 인해 초등학교만 나온 조행권(1942~1980) 씨는 만 서른여덟의 나이에도 아직 결혼을 못해 부모님께 죄송한 건설현장 막노동자였다. 매일 시위에 참여하던 그는 시민들을 차량으로 운송하다가 광주 시내로 재진입하던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사망한다.
하아따 징허게도 시퍼런 하늘이궁만
내 고향 징헌 사투리
내 이승 얼 / 내 저승 넋
이 징헌 것 어따가 / 놔둘 것이랑가
내 고향은 영광
아버지는 / 환갑노인
새벽 해소로 가르랑가르랑
하루를 된기침 잔기침으로 시작허시는디
징헌 하루하루
오든지 말든지 / 가든지 말든지
일년에 한두 번
허나 그 고향에 다니러 가는 날이
내 평생 가장 복된 날
< … >
그런 날 아니라면
날마다 / 이 일 저 일
막일 되는대로
씨멘트 버무리기 삽질
씨멘트 버무린 것 져나르기
돌무더기 져나르기로
등뼈 작신작신 쑤시는 날들인디
(‘조행권’, 29권)
그런 그가 “군대놈덜 시민 때려죽인다는 말 듣고 / < … > // 마구 돌무더기에 사발 내던지고 / 생전 처음으로 / 금남로 큰거리로 나가” “시체 널브러진 거리 / 핏자국 거리”를 보며 그의 “몸 밑창에서도 / 무엇인가 시커먼 것이 치솟아뿌렀”음을 고백한다. “생전 처음 치솟은 시커먼 분노”를 안고 “무턱대고 / 도청 시민군에 가담해뿌”린 그에게 “생전 처음 < … > 뱃구레 가뜩 / 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커졌다(앞의 시).
노총각 홀아비도 순 검불도 순 무식꾼도
이 안 닦고도
당당하였네 하늘에 뜬 해동청 당당하였네
시장 아주머니들의 주먹밥 넙죽 받아먹었네
< … >
시민군 차 타고
시내를 내달렸네 시외를 내달렸네 바람이었네 깃발이었네
여태까지 몰랐던
내 운세 열려뿌렸네 탁 문 열렸네
이제까지 모르는 것
하나하나 알아뿌렀네
5월 23일 동운동 금호고 앞거리
거기까지였네
매복 공수 사격
거기까지였네 내 숨결
여한 없네
여한 없네
(‘조행권’, 29권)
계엄군이 들어오기 전, 1980년 5월14~16일 전남도청 앞 분수대 광장에는 '민족·민주화 성회'가 열려 시민토론장이 펼쳐지고 횃불행진이 뒤따랐다. 비상계엄 해제와 민주화 일정을 요구한 이 대규모 집회가 수천에서 수만 명으로 확대되는 동안 전 과정이 질서정연하고 평화롭게 유지되었고 이는 2016-2017의 지난 몇 달 동안 우리 국민들이 이루어낸 위대한 촛불집회의 질서·평화와 같은 것이다. 80년 5월 도청 앞 광장을 가득 메웠던 민주화의 열망은 2016년 광화문 광장의 열망으로 계승되었고 전국 곳곳의 도심에서 피어났다. 2017년 이 찬연한 5월, 개표결과에 환호하던 ‘오월 광장’의 국민들은 다시 희망을 품기 시작한다.
1980년 5월16일 전남도청 앞 분수대 민족민주화성회 모습. 사진/뉴시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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