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두 권의 책이 있다. 첫 번째 책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자서전인 ‘거래의 기술’. 부동산업계 큰 손이었던 그는 1987년 펴낸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사업가 기질을 다분히 드러낸다. ‘상대방을 교란하고 진심을 떠본다. 기선을 제압하고 약점을 찌른다. 판을 깰 수도 있다는 위협을 하면서 좋은 조건으로 유인한다’는 전략은 대통령이 된 지금도 여전한 듯 보인다. 특히 외교 무대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예측할 수 없는 언행으로 상대국을 혼란에 빠뜨리고, 원하는 것들을 얻어가려 하고 있다.
다른 한 권의 책은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현 한국외대 교수)이 쓴 ‘김현종, 한미 FTA를 말하다’. 거래의 기술이 나온지 20년 후인 2007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되는 과정을 상세히 소개했다. 양국을 오가며 협상이 이뤄지는 가운데 회담 시간·장소 선정에서부터 보이지않는 기싸움과 상대 전략을 파악하기 위한 눈치싸움, 최종 타결 불과 며칠 전 협상 결렬을 각오했던 일까지. 책에 기술된 협상과정은 드라마틱했다. 타결 발표 직후 미국 측 협상가들이 진을 빼고 본국으로 돌아갈 만큼 치열하기도 했다.
20년의 시차를 보이며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두 책은 지난 12일(현지시간) 미 무역대표부(USTR)의 ‘한미 FTA 개정협상 요구’에서 만난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후보시절부터 군불을 떼기 시작하더니 지난달 30일 문재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후 한미 FTA 재협상 개시를 선언했다. 우리 측의 “재협상이라는 용어는 잘못된 것”이라는 수차례 반박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대통령은 일관되게 '재협상(renegotiation)'을 강조하며 압박하는 중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의도가 무엇이든지 간에 압박의 강도는 더욱 세질 것으로 보인다.
우리 정부 입장도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10년 전 한미 FTA 협상 과정에서 김 전 본부장을 비롯한 우리 측 협상팀은 반대 측으로부터 ‘매국노’ 소리를 들어야 했다. 국내 갈등도 심각했다. 자칫 잘못 대응할 경우 당시의 혼란이 재현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당당하게 임하라”고 말한 것은 적절해 보인다. 문 대통령은 한미 FTA 체결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모든 과정을 지켜봤다.
다만 한 가지 우려되는 대목이 있다. 개정협상 논의가 본격화될 경우 이를 진두지휘할 통상교섭본부장 인선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국회에 제출된 정부조직법 개정안은 일자리 추가경정예산안 처리와 일부 장관인사를 둘러싼 여·야 갈등 속 한동안 잠자고 있었다. “(개정협상 논의를) 통상교섭본부장이 임명되고 나면 할 것이다. 미국도 그 점을 이해할 것”이라는 청와대 관계자의 말은 공허하다. 총성없는 전쟁터로 비유되는 국제통상 무대에서 우리 측 수장의 부재는 뼈아프다. 정부조직법 개정안 처리가 예정된 18일 국회 본회의를 주목하는 이유다.
최한영 정경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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