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영화 '아마데우스' 봤어요? '두구둑' 하는 마차 소리에 영감받아 오선지에 쫙 풀어내고 그러죠? 근데 사실 모든 음악이 그렇게 만들어지는 건 아니에요."
뮤지션하면 떠오르는 모차르트 같은 거대 환상을 단숨에 깨트린 뒤, 그는 바로 말을 이었다. "작곡이란 건 사실 굉장히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작업이에요. '두구둑' 하는 그 소리를 피아노 앞에 앉아 한음 한음 짚어 갈 때 비로소 곡이 풀리죠. 가사 같은 경우, 안 나올 땐 새벽에 눈이 떠져요."
13년 간의 '창작 무(無) 세계'를 갓 탈출한 이 뮤지션에게는 여전히 마그마 같은 열정이 용솟음쳤다. 완벽주의에 가까운 작곡, 작사 과정과 무시무시한 작업량, 무한정 샘솟는 음악에 관한 아이디어들…. 20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올해 데뷔 30주년을 맞은 가수 김현철(50)을 만났다.
3일 전 그는 10집 '돛'을 세상에 공개한 참이었다. 정규 앨범 형태로 음악을 내는 건 2006년 9집 '토크 어바웃 러브(Talk about love)' 이후 13년 만. 재미가 없어 중단했던 음악은 긴 암흑 시간을 지나 다시 삶의 자극제로 바뀌고 있다. "작년부터 발동 걸려서 쓴 곡이 총 30곡이에요. 매월 싱글로 한, 두 곡씩 푼다 치면 2년 반이 족히 걸릴 정도의 양이었죠. 이번에 못 담은 곡은 내년 봄쯤 나올 거예요. 아마 또 정규?"
과거 음악에 향수를 느끼는 최근 분위기가 그를 점차 변화시켰다. '시티 팝' 열풍이 불면서 그의 1집 곡들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시티 팝은 미국 퓨전재즈를 일본식으로 해석한 70~80년대 팝 스타일 장르. 미디엄 템포 기반의 도회적이고 세련된 느낌이 특징이다. 지난해 후배가수 죠지와 꾸민 '오랜만에' 합동 공연은 올해 그가 본격 새 음악 작업에 '돛'을 올린 계기가 됐다.
올해 데뷔 30주년을 맞은 가수 김현철.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이날 카페에서 만나기 2시간 전, 인근 CKL 스테이지에서 열린 음악 감상회 도중. "왜 김현철 음악이 세상 밖으로 다시 불려 나온 것 같냐"는 본지 기자 질문에 그는 "시대가 찾은 음악이기 때문"이라는 '현답'을 내렸다. "저는 최근 시티팝 붐도 그렇게 봅니다. 그건 특정 연령층이 아닌 시대가 음악을 만든 거예요. 제 데뷔작도, 지금 제 음악도 결국은 제가 만든 것이 아닌 셈이죠. 이런 시대에 살아감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시대가 만든' 그의 새 음악은 더 이상 자신의 내면 만을 향하지 않는다. 녹록지 않은 현실 속 주변을 살피고 '함께 가자'는 희망을 새긴다.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시인과 촌장 2집 수록곡 '푸른 돛' 리메이크 곡은 이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곡. 갈매기 울음으로 시작해 바다, 노젓는 소리가 앰비언트로 깔리는 음악은 출항을 앞둔 배에 선 느낌을 준다. 리메이크 곡을 제일 서두에 배치시킨 것도 한국 대중음악 사상 이례적인 일. "배 안에 여러 사람들이 타 있는 거에요. 저와 함께 한 밴드, 가족, 팬, 주변인들, 평소 존경하던 하덕규 선배…. 빨리 가길 바라는 것도, 멀리 가길 바라는 것도 아니에요. 그저 '함께'란 의미를 담고 있을 뿐이죠. 나만 보던 과거에서 이젠 탈피한 거죠."
'꽃'은 이른 나이 삶을 포기하는 청춘들에 관한 곡. 동료 뮤지션 박창학이 던져 준 글귀에 살을 붙여완성된 노래다. "아름다운 눈을 갖고 있는데 스스로 알지 못할 때 눈물이 앞을 가린다는 글귀였죠. 얘기해보니까 평소 자살 방지에 관한 곡을 쓰고 싶었다고 하더군요." 서울 신당동 할머니 댁을 생각하며 쓴 '그 여름을 기억해'는 누구나 마음 한편에 품고 있을 어린 시절 아련한 동네 모습을 연상시킨다. 노래 중간 튀어나오는 야구 중계소리, 매미 소리가 따스하고 정겹다.
총 17곡이 수록된 앨범은 시티팝, 발라드, 재즈 등 장르를 오가며 절망적 현실에서 공생(共生)의 희망을 그린다. 그는 "이번 앨범을 작업 하는 내내 '의미가 있나'란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며 "의미는 아침에 생기다가 오후엔 순간 사라져 절망이 됐다. 하지만 녹음으로 첫 삽을 뜬 후부터, 의미를 내려 놓고자 하는 순간부터 희망이 됐다"고 설명했다.
앨범 재킷과 동일한 '돛' 문양이 걸린 공연 포스터. 김현철은 10집 발표 후 서울,인천, 안양 등을 도는 투어를 한다. 내년 미국 투어도 준비하고 있다. 사진/FE스토어
'함께'의 의미를 담은 만큼 앨범 역시 여러 뮤지션들의 숨결로 완성됐다. 백지영, 황소윤, 정인, 박원 등 후배 뮤지션들의 피처링은 물론 10년여 전 심현보, 정지찬, 이한철과 결성한 프로젝트 그룹 주식회사도 참여했다. 녹음에는 그의 밴드가 함께 했다. E.O.S의 멤버 조삼희, 하모니카 솔리스트 권병호 등 총 5명의 뮤지션들이 도움을 보탰다. "함께 가자는 곡의 의미처럼 다양한 소리가 뒤섞이길 바랬다"고 그는 설명했다. 'We Can Fly High'에는 한국 대중음악 타이틀곡 역사상 이례적으로 드럼 솔로가 4마디 담겼다. "(유)희열이가 이 노래 미쳤다, 재밌다 그러더라고요. 원곡 8마디를 CD에는 4마디로 줄여 담았어요. 지금 독일에서 찍고 있는 LP엔 8마디가 담깁니다."
김현철은 작년 10집 돌입 때부터 '투 LP' 제작을 염두에 두고 작업했다. 어릴 적 예스, 핑크플로이드, 레드제플린 등 영웅들의 더블 앨범이 그의 '로망'을 자극했다. 올 겨울 72분짜리 CD 한장에 우겨 넣을 수 있는 분량을 굳이 23~24분짜리 A면, B면에 나눠 담은 LP가 나온다. 현재 4대째 이어오고 있는 독일의 한 레코드 제작사가 그의 판을 만들고 있다. "하이 레벨(고음역대)이 심해서 LP 마스터링을 다시 하는 작업도 거쳤어요. LP는 따뜻한 질감이 살아야 맛인데 말이죠."
인터뷰 말미 마지막으로 그가 대중에게 짧게라도 꼭 이 말을 전해 달라고 당부했다. 내년 데뷔 30주년을 맞는 015B 등 선후배, 동료 뮤지션들을 위한 말. "우리나라 대중음악계라는 건 360도, 구 형태일지도 모릅니다. 각자 하는 문화적 행위가 결국 서로 몰려들 때 저는 풍성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저 말고도 저보다 더 오래 음악 하신 분들, 저와 함께 데뷔한 친구들도 많습니다. 그분들에게도 많은 관심을 가져주세요."
네임펜을 든 그가 앨범 한편에 필기체로 적어 주었다. '우리 대중음악을 지켜주세요'
가수 김현철. 사진/FE스토어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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