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밴드신의 ‘찬란한 광휘’를 위해 한결같이 앨범을 만들고, 공연을 하고,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TV, 차트를 가득 메우는 음악 포화에 그들은 묻혀지고, 사라진다. ‘죽어버린 밴드의 시대’라는 한 록 밴드 보컬의 넋두리처럼, 오늘날 한국 음악계는 실험성과 다양성이 소멸해 버린 지 오래다. ‘권익도의 밴드유랑’ 코너에서는 이런 슬픈 상황에서도‘밝게 빛나는’ 뮤지션들을 유랑자의 마음으로 산책하듯 살펴본다. (편집자 주)
23일 오후 4시 ‘드럭레코드’ 사무실에서 올해 데뷔 25주년을 맞은 밴드 크라잉넛[박윤식(메인보컬, 기타), 이상면(기타), 한경록(베이스), 이상혁(드럼), 김인수(아코디언, 키보드)]을 만났다.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마스크를 쓰고 주먹인사를 끝낸 그들은 곧바로 시계태엽을 되감았다. 1994년 뜨겁게 들끓던 열혈청춘의 여름으로…. 기억은 지금의 상수역 극동방송 인근 ‘그 곳’에 닿았다.
흡사 럼주를 걸친 해적들이 도사리다 튀어나올 것 같던 곳. 칵테일을 주문하면 프림을 얹어 “좋은 거”라 속삭이던 이 미스터리의 공간은 당초 음악 감상실 겸 일반 주점이었다.
그러다 이듬해인 1995년 커트코베인의 1주기 추모 공연을 계기로 ‘음악 환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새로운 기능과 역할을 하는 공간으로 점차 변모했다. ‘악기 몇 대쯤 부서져도 괜찮은 곳, 당시 생소했던 펑크(Punk) 음악의 메카’. 한국 펑크록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드럭(DRUG)’의 초기 시절 얘기다.
소란과 굉음, 반항으로 무장한 펑크 정신은 이때부터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당시는 라이브클럽 문화를 ‘불법 족쇄’로 묶어두던 시절. ‘소란 피우지 말라’는 경찰과 씨름하면서도 음악인들은 기타를 더 세게 쥐었다. 하늘로 향한 가위 같은 두 다리로 세상의 속박과 통제를 거세했다. 1996년 드럭은 단순 클럽을 넘어 음반 레이블로 확장한다. 크라잉넛, 노브레인, 레이지본, 락타이거즈, 자니로얄, 비바소울 같은 팀들이 다 이 때 나왔다. 이 조그만 클럽에서의 열기는 끓는점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거리로 터져 나갔다.
“1996년 5월 서울 홍대 앞과 명동 길거리에서 열린 그 공연(‘스트리트 펑크쇼’)을 아직도 잊지 못해요. 펑크, 록에 대한 대중들의 갈망을 눈앞에서 확인한 셈이었죠.”
밴드 크라잉넛. 사진/드럭레코드
드럭의 역사는 이들의 역사이자 한국 펑크록 자체다. 바람이 매섭게 불던 23일 오후 4시 ‘드럭레코드’ 사무실에서 올해 데뷔 25주년을 맞은 밴드 크라잉넛[박윤식(메인보컬, 기타), 이상면(기타), 한경록(베이스), 이상혁(드럼), 김인수(아코디언, 키보드)]을 만났다. 지금은 홍대입구 인근의 한 건물 지층이 이들의 사무실이자 합주실 겸 녹음실. 난로 앞 둥그렇게 모여 앉은 이들은 “이제는 ‘아재 밴드’가 돼 버렸다”며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들의 탄생 비화는 어쩐지 갓 스무살들이 찍은 청춘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우연히 함께 보러 간 공연, 객석으로 몸을 던진 다이빙, 당시 ‘드럭’의 이석문 사장의 갑작스런 오디션 제의….
당시는 너바나 같은 얼터너티브 록이 유행하던 시절이었지만 이들은 어쩐지 펑크의 매력에 꽂혔다. 섹스피스톨스, 그린데이, 랜시드, 백 같은 팀들을 보고 “이거다”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베이스 잭도 빠진 머쓱한 합주지만 오디션에 합격했다. 자신들이 미친 사람처럼 놀던 그 객석 위 하우스밴드(고정 밴드)로 무대에 섰다. 3년 간 매주. 목, 금, 토, 일….
“그때 실력이 엄청 많이 늘었던 것 같아요. 무슨 곡을 카피할까, 어떤 자작곡을 써볼까 같은 고민들을 정말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공연도 같은 레퍼토리로만 하면 관객들 분위기 싸해지는 체감이 확 오거든요.”(경록) “펑크란 무엇인가 밤새 토론도 많이 했고, 순수했던 시절이었어요.”(윤식) “뭐? 그 3원칙? 여자친구 있으면 안되고, 돈 많으면 안되고, 서로 닭머리 밀어주고?”(상혁) “푸하하”(멤버들)
밴드 크라잉넛. 사진/드럭레코드
잦은 술모임과 단단한 합주로 ‘펑크 정신’을 다진 이들은 1998년 기념비적인 데뷔작 ‘말 달리자’를 냈다. 원초적인 트윈기타 리프와 날 것 같은 가사, 목소리는 전국의 TV와 라디오, 노래방으로 퍼져갔다. 당시는 IMF 외환 위기로 한국 경제가 침체의 늪에 빠져 있던 시기. 국민 전체가 상실과 무기력에 허우적 될 때 이들의 얼얼한 펑크 사운드는 일종의 삶의 촉진제이자 자극제였다.
돌아보면 IMF 때를 시작으로 이들의 음악은 늘 한국 사회와 닿아 있었다. 풍자 미학이 빛을 발하던 2집 ‘서커스 매직 유랑단’ 활동 당시는 라이브클럽 합법화에 앞장섰고, 스카와 하드락, 폴카까지 확대하던 3집 ‘하수연가’ 직후는 2002년 월드컵 100만 관중 앞에 서서 노래했다. 사라져버린 삐삐와 피시통신, 졸라맨과 플래시몹, 퇴폐 문화로 전락해버린 클럽과 거대 자본이 점유해버린 홍대….
이 모든 세월의 격랑이 낭만으로 빚은 가사에 흘러왔다. 밤에 취해 춤을 추는 불빛들(‘밤이 깊었네’)을 보고, 세계지도를 펼쳐 룩셈부르크라는 나라를 찍고(‘룩셈부르크’), 부어라 마셔라 춤을 추며(‘내 인생 마지막 토요일’). 2018년 정규 8집 ‘리모델링’까지 쌓아올린 촘촘한 100여곡은 크라잉넛이 동고동락해온 세월의 파란만장한 기록이다.
밴드 크라잉넛. 사진/드럭레코드
데뷔 25년차인 밴드는 올해 8월을 목표로 25주년 베스트 앨범을 준비 중이다. 100여곡에 달하는 자작곡 중 16곡을 솎아 구성할 예정이다. 원곡 그대로의 느낌에 숙성된 ‘세월’ 만을 얹는다. 화려한 기교보다는 아련한 향수를 살리고자 했다. 각 앨범의 주요 타이틀곡을 비롯해 시대상이 담긴 곡, 녹음이 아쉬웠던 곡을 추려냈다. 30일 정오 곡 ‘밤이 깊었네’가 먼저 발표된다.
멤버들은 “요즘 앨범 작업을 하면서 나타났다 사라진 수많은 것들을 생각한다”고 했다. “돌이켜보니 우리 곡들엔 그 때 그 시절, 추억, 시대상이 참 많이도 묻어 있어요. 박자를 쪼개고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 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냥 과거 스피릿을 살리는 형태로 가보자 했습니다.”(경록)
스스로 ‘아재 밴드’가 됐다는 멤버들은 개구진 아이 같은 말들을 가득 이어 붙인다. “목소리는 좀 느끼해졌어요. 풉”(윤식) “괜찮아, 파형(디지털 기기 녹음시 음파 기록)만 예쁘면 돼”(인수) “아, 릴 테이프로 작업하던 거 생각 나? 그땐 파형도 없었어.”(상혁) “아이고. 꼰대 밴드 다 됐네. 푸하하”(경록)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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