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레♭부터 도 사이(‘D♭ major’)를 오르내리며 반짝이는 아르페지오 물결, 분당 박자수 148의 파워풀한 스피드 드러밍, 이런 소리적 경쾌와는 대비되게 극한으로 치닫는 우울한 가사…. 도시 야경처럼 휘황하면서도 저릿한 데뷔곡 ‘Mr.Brightside(2003)’는 이들을 단숨에 라스베이거스에서 런던 한복판으로 이동시켰다. ‘록의 본류’ 영국을 휩쓸며 세계적 스타덤에 오른 미국 4인조 록 그룹 더킬러스. 80년대풍 뉴웨이브에 포스트 펑크와 고딕 록, 개러지를 황금 비율로 뒤섞으며 이들은 지난 15년 간 세계 록 트렌드를 단숨에 바꿔 놓고 말았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신스음에 단계적으로 철컥대는 기타리프와 직선적 보컬을 버무린 더킬러스 만의 ‘혼종 록’은 팝과 힙합이 득세하는 시대에 여전히 록 향수를 지닌 이들의 심박수를 높인다.
‘죄의 도시’라 불리는 라스베이거스에서 태동한 밴드는 이 도시가 부여한 유일한 ‘면죄부’다. 록이 사망선고를 받은 지금, 이들의 음악은 여전히 세계 전역으로 뻗어간다. 2004년 데뷔 이래 총 2800만장에 이르는 음반을 판매하고 6개 대륙 50개 국가에서 공연해왔다. 그래미 어워즈에 7차례 후보로 올랐으며 매디슨 스퀘어 가든, 웸블리 스타디움, 글래스톤 베리 등 대형 음악페스티벌에서는 이들을 간판출연진(헤드라이너)으로 무대에 올린다. 미국 출신이지만 대표곡 ‘Mr.Brightside’, ‘Human(2007)’는 영국에선 밴드 오아시스에 이은 ‘국민 성가’ 수준. 펫샵보이스, 뉴오더의 멜로디 잔향에 조니 캐시의 반항 기질이 아른거리는 그들은 명실상부 ‘21세기 성공한 밴드 중 한 팀’이다.
더킬러스. 사진/유니버설뮤직코리아
더킬러스가 긴 침묵을 깨고 ‘록 킬러’로 돌아왔다. 8월21일 전 세계에 공개한 6번째 스튜디오 앨범 ‘Imploding The Mirage’를 통해서다. 전작 ‘Battle Born(2012)’, ‘Wonderful Wonderful(2017)’에서 감상적 발라드풍(모들린 발라드풍) 사운드를 시도한 그들은 근 3년 만에 록커로 탈피, ‘제 3의 전성기’를 향한 날개를 폈다. 올해 상반기 스트록스, 딥퍼플이 지핀 록의 불꽃을 하반기엔 결국 이들이 이어받았다.
더킬러스[로니 배누치 주니어(드럼), 마크 스토머(베이스), 브랜든 플라워스(보컬)]는 뉴스토마토와의 한국 독점 인터뷰에서 “지난 몇 년 간 ‘폭풍 뒤 고요함’ 같은 생의 시기를 관통했다”며 “이번 앨범은 그 인내 끝에 얻은 축복이자 삶에서 발견하게 된 아름다움에 관한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밴드 주축이자 ‘브레인’ 플라워스의 사적 경험이 이번 신보의 뼈대다. 아내 타나가 겪어온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함께 극복하기 위해 그는 가족들을 데리고 몇 년 전 라스베이거스에서 유타주로 이사를 했다. 산으로 둘러싸인 조용한 시골마을에서 세상과 잠시 ‘거리두기’를 하며 스스로를 성찰했다.
“기존 것들로부터의 탈피. 이 기간은 제 삶의 변곡점이었습니다. 우린 감정 깊숙이 들어가며 내면의 평화를 찾기 시작했어요. 과거 ‘죄의 도시’(라스베이거스)와 동일시하던 우리 자아(라스베이건스)에 사망선고를 내린 셈이죠.”(브랜든 플라워스)
이번 신보의 제목은 실제 이들이 나고 자란 라스베이거스의 한 호텔이름 ‘The Mirage’에서 따왔다. 그 도시의 상징성을 ‘폭파한다(Imploding)’는 뜻.
자유와 성찰의 물결은 곧 사운드의 기쁨과 활기, 대담함으로 이어졌다. 첫 곡 ‘My Own Soul’s Warning’부터 데뷔작 ‘Mr.Brightside’처럼 영롱한 신스 물결은 앨범 전체를 휘감는다. 150이 넘는 분당 박자수로 찍어대는 드럼 비트와 탄산수처럼 시원하게 뻗어나가는 전자 기타 사운드. 이 촘촘한 사운드를 뚫고 밴드의 ‘전매특허’ 플라워스의 음성은 천국으로 비상할 것처럼 날아오른다.
“음악인들은 작업할 때 스튜디오에서 유니콘이나 번쩍이는 섬광(번개) 같은 걸 본다고 하죠. 이번 작업 때 바로 운 좋게 그런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우리는 몇 차례 우주를 두드렸죠.”(브랜든 플라워스)
어둠에서 빛을 향해 나아가는 천상의 부부 모습. 앨범 커버에 박제해둔 이 이미지엔 최근 몇년간 '거리두기'로 자아를 회복한 플라워즈 가족들의 미소가 일렁인다. 사진/유니버설뮤직코리아
앨범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데뷔 초 더킬러스로의 완벽한 복귀다. 댄서블한 멜로디에 경고, 죄 같은 직설 내지 반전 가사들(‘Caution’)은 뉴오더를 떠오르게 한다. 내면 성찰적 읊조림을 활기 넘치는 멜로디에 도배해버리는 곡 ‘My God’ 후렴구에서는 펫샵보이즈의 ‘Go West’가 아른거린다. 플라워즈는 마무리 짓는 앨범과 동명의 곡을 두고 “유타주 집에서 작사, 작곡, 녹음 전반을 마쳤다”며 “그간 몇 년간 꺼내놓지 않던 깊은 감정이 외부 세계와도 연결돼 있음을 깨닫게 됐다. 이 앨범은 지금 내 삶에 불어 닥친 막대한 행복의 실존에 관한 것들”이라고 털어놨다.
플라워스와 함께 기타 톤을 다듬던 데이브 큐닝의 부재가 아쉽지만, 그것 또한 이번 앨범의 특이점이다.‘공란’을 외부 작곡가, 프로듀서진과의 협업으로 메꿈으로써 오히려 전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사운드를 유입시켰다.
벡, 워온드럭스 등과의 작업으로 그래미 상을 5번이나 거머쥔 캐나다 출신 프로듀서 숀 에버렛은 작업 기간 내내 플라워즈 스튜디오에서 살다시피 했다. 드러머 로니 배누치 주니어는 그와의 협업을 통해 “신스음을 주 동력삼던 밴드의 사운드가 새로운 확장성을 띄게 됐다”고 말한다. 새 앨범을 대표하는 곡 중 하나인 ‘Caution’에는 지난해 데뷔 50주년을 맞은 전설의 밴드 플리트우드 맥의 기타리스트 린지 버킹엄이 참여했다. 수십개의 직렬 기통을 달고 달리는 경주차 같은 속도감을 곡에 불어넣었다.
“어느날 저녁 하루 만에 와서 그렇게 ‘금’을 주고 갔어요. 타는 듯 질주하는 연주로 우리가 생각하던 사운드를 구현해줬죠.”(브랜든 플라워스) “곡을 2D에서 3D로 만들어버렸습니다.”(로니 배누치 주니어)
더킬러스는 여전히 4인조 밴드다. 멤버들은 기타리스트 데이브 큐닝의 자리를 여전히 남겨뒀다. 사진/뉴시스
일부러 ‘거리두기’를 택해 얻은 이들의 자유와 일탈, 성찰은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상화된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
“음악을 만드는 뮤지션이라면 자기 계몽과 행복의 탐구를 계속해야하죠. 지난 몇 년간 음악은 제 삶에 얼마나 큰 부분인지 알게 해줬습니다. 앞으로도 1초도 뺏기지 않고 그것들을 기록할 겁니다.”(브랜든 플라워스)
어둠에서 빛을 향해 나아가는 천상의 부부 모습. 앨범 커버에 박제해둔 이 이미지엔 자아를 회복한 이의 미소가 일렁인다. 플라워즈는 이번 앨범에 함께 하지 못한 데이브 큐닝과 관련해 “샌디에이고에서 가족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가 언제든 돌아오겠다고 하면 환영할 것”이라 했다.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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