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대중음악신의 ‘찬란한 광휘’를 위해 한결 같이 앨범을 만들고, 공연을 하고,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TV, 차트를 가득 메우는 음악 포화에 그들은 묻혀지고, 사라진다. ‘죽어버린 밴드의 시대’라는 한 록 밴드 보컬의 넋두리처럼, 오늘날 한국 음악계는 실험성과 다양성이 소멸해 버린 지 오래다. ‘권익도의 밴드유랑’ 코너에서는 이런 슬픈 상황에서도 ‘밝게 빛나는’ 뮤지션들을 유랑자의 마음으로 산책하듯 살펴본다. (편집자 주)
“ESTATE (에스따떼), 이태리어로 여름이라는 뜻인데요. 여러 은유적 의미로 생각해볼 수 있겠죠. 사랑했던 사람일 수도 있고, 코로나가 빼앗아 간 우리의 일상일 수도 있고.”(재즈 보컬리스트 웅산)
지난 18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인근의 소규모 음악 바 가우초. 라이브 연주에 맞춰 들썩거리던 스무명 남짓한 관객들이 일순간 숨을 죽였다.
이내 블루스 스케일의 화성 파도가 덮쳐온다. 나른하고 부드럽게 구르는 해먼드 오르간(성기문)과 리듬 잔향을 더하는 어쿠스틱 기타(찰리 정), 수면 아래로 반쯤 잠긴 듯한 허스키 보이스(웅산)…. 공간은 다시 달그닥 거리기 시작한다. 여기저기 피자와 맥주를 주문하고 누군가는 고개를 흔들고 또 누군가는 서서 춤을 춘다. 저마다 각자의 2년은 안녕하신지. 노래와 연주가 시종 물어왔다.
“이런 모습이 아주 자연스러운 재즈 공연장의 풍경이죠. 여러분들은 언제든지 앉아 있다가 소리를 질러도 되고 박수를 쳐도 되고 춤을 추셔도 됩니다. 그게 재즈죠.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보는 것, 하지만 머물러 있지 않는 것.”(웅산)
지난 18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인근의 소규모 음악 바 가우초에서 열린 재즈 보컬리스트 웅산의 무대.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이날 이 무대는 재즈평론가이자 가우초 대표인 남무성과 웅산이 의기투합한 프로젝트 ‘다섯 주말 여섯 밤의 재즈퍼포먼스’ 일환으로 열린 첫 무대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수십 년 역사를 뒤로 한 채 하나둘 문을 닫은 재즈 클럽 신을 보며 두 사람은 지난해 연말 “한국 재즈 문화를 일으켜보자” 결의했다.
“코로나 사태 전보다 무대가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재즈 음악가들과 재즈 팬들이 격의 없이 만나는 자리를 마련해보고 싶었습니다. 공연을 위해 설계한 정식 재즈 클럽은 아니지만 이렇게라도 재즈 문화 부흥에 기여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어요.”(남무성)
이날 웅산과 두 연주자(찰리 정, 성기문)는 국내 1세대 재즈 보컬리스트 고 박성연(1955년 ~ 2020년)이 남긴 한국 재즈의 유산을 탐험하고(‘바람이 부네요’) 블루스의 연대기(빌리 할리데이 ‘Don't Explain’·재즈민 설리번 ‘Bust Your Windows’ 등)를 되짚었다. 앙코르 곡으로 3~4년 전부터 연마한 국악 절창(‘쑥대머리’)을 선보일 때, 재즈는 급기야 ‘횡단의 음악’이 됐다.
주로 클래식 전용 공연장으로 활용돼 온 서울 송파구 롯데콘서트홀은 지난 19~20일 대중음악 공연장으로 탈바꿈했다. 가수 하동균과 밴드 넬이 차례로 무대에 선 ‘오노프 콘서트’가 이 자리에서 열렸다.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하루가 다르게 창조와 상상이 잉태되고 기 존재하던 장벽과 경계를 허물고 있다. 세계적인 감염병 위기가 인류를 위협하는 시대의 역설이다. 포스트팬데믹 시대 유령 공연장은 지금 새로운 변주곡을 만들어 내고 있다.
주로 클래식 전용 공연장으로 활용돼 온 서울 송파구 롯데콘서트홀은 지난 20일 대중음악 공연장으로 탈바꿈했다. 가수 하동균과 밴드 넬이 차례로 무대에 선 ‘오노프 콘서트’가 이 자리에서 열렸다.
빈야드 스타일(포도밭형) 구조의 객석과 거대 파이프 오르간이 위치한 홀에서 모던 록 사운드를 감상하는 경험은 특별했다. 이런 형식의 공연(클래식 공연장과 대중음악 간 교류)이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최근에는 더욱 활발해지고 확대되는 추세다. 코로나 팬데믹 사태 이후 해외 클래식 연주자들의 내한 공연이 무기한 중단되면서다.
특히 롯데콘서트홀의 빈야드는 포도밭처럼 여러 구획으로 나뉜 각 구역의 객석이 무대를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어, 어떤 객석에 앉아도 무대와의 거리가 가깝다. 무대-객석 간 거리가 가까워 아티스트 공연에 대한 몰입감이 높다. 이 공연장은 일본 도쿄 산토리홀과 미국 LA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 등의 음향 설계를 담당했던 도요타 야스히사(‘나가타 음향’)가 맡아, 잔향과 울림이 풍부한 특성을 지니기도 한다.
빈야드 스타일(포도밭형) 구조의 객석과 거대 파이프 오르간이 위치한 홀에서 모던 록 사운드를 연주한 넬. (사진=롯데콘서트홀)
실제로 이날 감상한 두 팀 공연의 경우, 어쿠스틱 기타를 비롯해 스트링(현악) 사운드가 많이 쓰인 곡들(하동균 ‘지금 그리고 우린’, 넬 ‘위로’ 등)은 미세한 소리의 진동까지 타 공연장에 비해 명료하고 세밀하게 들릴 정도였다. 록 사운드의 경우 울림과 퍼짐이 다소 있어, 여타 일반 대중음악 공연장만큼 음향이 완전한 꼴은 아니었으나, 어쿠스틱 곡들을 중심으로는 풍부한 잔향을 느끼기 좋았다. 넬의 경우 ‘위로’ 순서 땐 파이프오르간에 조명을 쏘아 올리며 공연장 자체 시설들을 미장센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송지연 롯데콘서트홀 공연기획파트 책임은 “홀 자체의 잔향이 풍부하기 때문에 어쿠스틱 악기를 활용할수록 효과가 더욱 극대화되는 특징이 있다”며 “울림이 강한 록 스타일 곡들은 일반 대중음악 공연장보다 울림이 심할 수 있으나, 흡음커튼 등을 활용해 보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첫 발을 뗀 이 시리즈는 그간 정재형, 적재, 권진아, 정승환, 페퍼톤스, 최백호 같은 음악가들을 무대에 세워왔다. 그랜드 피아노 혹은 퍼커션을 활용하거나 현악기를 추가해 기존과는 다른 편곡 공연을 열고 온라인으로도 송출했다. 송지연 책임은 “상대적으로 더 위축되어 있던 대중음악신 아티스트들을 위한 무대를 마련해 활력이 되고자 하는 바람이 있었다”며 “추후 다른 곳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무대, 특히 장르간의 경계를 허무는 다양한 협업 무대들도 보여드리고 싶다”고 했다.
영국 런던 그리니치 반도 인근, 문화복합시설 ‘매거진 런던’에서 열린 라디오헤드 새 프로젝트 밴드 '더 스마일' 정식 데뷔 무대. (사진=강앤뮤직)
해외에서도 연일 독특한 공간의 독특한 무대가 세계 곳곳 암약한 관객들과 만나오고 있다.
올해 초 가장 인상 깊었던 공연은 홍대도, 이태원도, 그 핫하다는 성수에서 본 것도 아니다. 거실에서 상상의 보딩패스를 끊고 영국 런던 그리니치 반도 인근, 문화복합시설 ‘매거진 런던’에 닿았다. 지난달 30일 이 곳에서 열린 프로젝트 밴드 ‘더스마일(The Smile)’의 정식 데뷔 무대.
스마일은 라디오헤드의 톰 요크와 조니 그린우드, 재즈밴드 선스 오브 케멧의 드러머 톰 스키너와 라디오헤드의 프로듀서로 활동해온 나이젤 고드리치가 뭉친 팀으로, 지난해 ‘글래스톤 베리’에서 결성 기념 무대를 가졌다.
록앤롤과 블루스, 퓨어 팝을 횡단하는 조니의 기타를 중심으로 합을 맞춰가는 사운드는, 라디오헤드의 최근작보단, 초기작 중 하나인 ‘더밴즈’에 가까울 정도로 활기가 있는 사운드다.
이들의 공연을 온라인 생중계(테일러 스위프트와 콜드플레이 등을 연출해온 폴 더그데일이 프로듀서)로 감상하며 올 한해 세계 록, 대중음악계를 장식할 기념비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평소 이벤트, 시상식, 컨퍼런스, 패션, 아트 등의 전시 공간으로 쓰인다는 이 공간을 이렇게 바꿔놓을 줄이야. 비록 모니터상이지만 입장하면 온통 검은 화면과 자욱한 안개, 1000여명 관객들의 작은 소음이 맞았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The Smile’ 낭송과 함께 카메라는 2인칭 시점으로 대기실부터 무대까지 멤버들 뒤를 따라가며 긴장감을 극대화했다.
공연 내 모든 미장센은 스마일의 진한 음악 색깔을 느낄 수 있게 철저히 조율됐다.
가운데 둥그렇게 위치한 무대 사이사이는 꼭 거미 다리 형상 같은 LED 패널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제작진은 붉고 푸르게 오르내리는 발광효과를 곳곳에 심어 음악팬들을 매료시켰다.
한 손으로 피아노를 치다 이내 다른 손으로 그리스의 발현악기 리라(lyre)를 만지작거리거나 바이올린 활로 베이스 기타를 켜는 그린우드, 재지한 리듬으로 계속해서 변칙을 시도하는 스키너의 연주 사이로 요크는 계속해서 울부짖었다. 포스트펑크 기타 소음이 으르렁대는 ‘You Will Never Work in Television Again’ 때 360도로 돌아가는 스테디캠과 폭죽이 터지듯한 조명 세례 연출에선 팬데믹을 뚫듯 시원한 쾌감을 느꼈다.
지구 상에 당신이 본 적 없는 무대들이 지금 만들어지고 있다. 들리는가. 유령 공연장에서 유성우처럼 쏟아지는 변주곡들이….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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