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2023년 11월 16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모스코니센터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APEC 세션 I 초청국과의 비공식 대화 및 업무 오찬에 앞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인사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한중일 정상회의가 5월 말쯤 열릴 예정입니다. 우리 외교부 당국자가 논의의 마지막 단계에 있다고 말한 데 이어 한중일 정부가 다음 달 26~27일을 전후해 정상회의를 개최하는 방안을 최종 조율하고 있다고 일본 <요미우리신문>이 10일 보도했습니다. 2019년 12월 회의 이후 코로나19 등 문제로 열지 못하다가 4년 만에 다시 모이는 겁니다.
한중일 정상회의는 1999년 11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ASEAN(동남아국가연합)+3(한중일) 회의가 계기였습니다. 당시 한국은 김대중 대통령, 중국은 주룽지 총리, 일본은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참석했는데, 김대중 대통령이 이 모임의 정례화를 희망했고 중국과 일본이 응하면서 한중일 정상회의 틀이 만들어졌습니다.
제3국서 열리는 다자회의 무대가 아니라 한중일 세 나라 역내에서 별도로 3국 정상회의를 한 것은 2008년 일본 후쿠오카(福岡)가 처음이었고 그 뒤 일본-중국-한국 순으로 개최 순서가 정해졌습니다. 이에 따라 청와대와 외교부는 2010년대 초반부터 3국 정상회의 관련 발표에서는 원칙적으로 '한일중'을 공식 표기법으로 했으나, 다른 일반적 사안들에서는 '한중일' 표기도 많았습니다.
정부 내 다른 부처들은 보통 '한중일' 표기가 일반적이었고, 언론과 학계 등 민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본이 한일 과거사 문제에 퇴행적 모습을 보이고, 특히 중국이 국내총생산(GDP) 규모에서 일본을 밀어내고 세계 2위로 올라간 2010년 이후로는 이런 풍토가 더 확고해졌습니다.
윤 대통령, 2023년 9월 부터 '한중일→한일중'으로 표현
그런데 지난 2023년 9월 6일 윤석열 대통령이 인도시아에서 열린 아세안 정상회의에서 "이른 시일 내에 한일중 정상회의를 비롯한 3국 협력 메커니즘을 재개하기 위해 일본·중국과 긴밀히 소통해 가겠다"며 중국보다 일본을 앞세웠습니다.
용산 대통령실은 이에 대해 "우리 정부 들어 가치와 자유의 연대를 기초로 미일과 보다 긴밀한 협력이 이뤄지고 있다"면서 "그런 점에서 북미보다 미북으로 보고 있고 '한중일'보다 '한일중'으로 부르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앞서 같은 6월 국가안보실이 발간한 '국가안보전략'에서 일본을 중국보다 앞세워 표기한 점도 환기해줬습니다.
국내 언론들도 2022년 11월 캄보디아 프놈펜 아세안 정상회의 땐 '한중일'이라고 했던 윤 대통령이 중국보다 일본을 앞세운 것은 2023년 8월 캠프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의에서 3국 협력이 새 차원으로 격상된 것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습니다.
중국 관변 매체들은 예민하게 반응하겠습니다. 특히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자매지로, 평소 중국 정부의 입장을 과격하게, 날 것으로 대변해온 <환구시보>는 "윤석열 한일중 발언, 한국인만 이상하게 들은 것이 아니다"는 제목의 사설에서 "윤석열정부는 일본 친화적인 태도를 표하는 데 신경 쓰지만, 한국과 주변에서 의구심과 반대를 불러온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같은 달 12일 국무회의에서는, 다시 '한중일'이라는 표현을 두 번 썼습니다.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이날 "저도 궁금해서 '따로 의도가 있으시냐'고 대통령에게 물어봤다"며 "그랬더니 '앞뒤 맥락이 주로 중국 문제를 얘기하는 단락이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중국을 강조한다고 그랬는데 우리가 객관적으로 중국과 일본 관계를 얘기할 때는 한일중으로 나도 알고 있고 그렇게 정리하겠다' 이렇게 대답했다"고 전했습니다. 대통령실은 그러면서 "한일중으로 통일해주면 좋겠다"고 정리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빼도 박도 못하게 '한일중'이 된 겁니다.
작년 7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 참석차 리투아니아를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중국 반발…대통령실 "일본과 더 긴밀 협력, 한일중으로 통일" 정리
이어 11월에 <KBS> 보도본부도 기자들에게 '한일중'으로 바꿔쓰라고 '권고'했습니다. '북미'도 '미북'으로 바꾸고, '한반도 비핵화'도 '북한 비핵화'로 대체했습니다. 현 정부 친화적인 언론들도 이를 따르고 있습니다. 통일연구원 등 정부 산하 국책연구소들은 이미 관련 지시가 내려갔습니다. '북중러'를 '중러북'으로, '북일'을 '일북', '북러'를 '러북'으로 등등 말입니다.
오랜 언어습관을 바꾸는 건 쉬운 일이 아니죠.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는 자괴감이 따라붙을 수밖에 없습니다. 쓸데없는 외교적 거부감과 마찰의 소지라는 점이 더 문제입니다.
범정부 차원에서 외교안보 관련 용어를 바꾼 윤석열정부가 이제 와서 이를 바꿀 리도 없고, 지금 바꾸는 것도 사실 '모냥(모양의 방언) 빠지는' 일입니다.
그건 그대로 가더라도, 이번 한중일 정상회의는 그동안의 미일 '편향' 외교에서 균형을 잡는 계기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한미일에 대칭으로 북중러를 단순한 한 덩어리로 묶지만, 중국과 북러의 이해관계는 차이가 큽니다. 현재의 북한과 러시아는 신냉전 구도로 갈수록 이익이 되지만, 중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탈냉전-세계화 체제의 최대 수혜자인 중국은 미국과의 경쟁과 별개로 경제협력이 여전히 절실한 상황이라는 점은 누구나 인정합니다.
북러와 이해관계 다른 중국…한국 관리 필요성
애초 정부는 한중일 정상회의를 지난해 말까지 개최하는 것이 목표였지만 중국은 소극적이었습니다. 그랬던 중국이 이번 회의에 응한 것은 일본과 한국에 대한 관리 의도가 강해 보입니다. 북러가 밀착하는 상황에서 한미일의 밀착이 가속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윤석열정부를 '협력보다는 위기관리 대상'으로 상정한 중국은 노골적으로 한국을 흔들지는 않고 있습니다. 중국 당국 내부에서는, 사드 배치는 문재인정부가 한 것도 아닌데 문재인정부에게 과잉 대응했고, 코로나19가 끝나면 시진핑 주석이 방한하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다고 합니다. 이와 함께 한국을 한미일 연대의 '약한 고리'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또 한국의 4.10 총선에서 집권당의 패배와 윤석열정부의 약화가 예고된 상황이라는 점도 고려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중국은 중국의 속셈이 있는 것이지만,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기회로 활용하면 될 일입니다. 이번 한중일 정상회의를 성공시키고, 그렇게 해서 시진핑 주석의 방한으로 연결시켜야 합니다. 한러 관계가 '인질외교'까지 등장할 정도로 역대 최악인 상황에서 중국과의 관계까지 완전히 망가진다면, 한반도의 불안정성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고, 북한에는 정말 조그만 영향도 미칠 수 없게 됩니다.
이번 4·10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당한 역대급 참패는 '윤석열식 외교안보'에 대한 심판이기도 합니다. 이제 방향을 바꾸라는 겁니다.
황방열 통일·외교 선임기자 hby@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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