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다는 것, 혹은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물 위에 손으로 선을 긋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조직의 리더로 새로운 기관에 부임한 뒤, 나름 열심히 했다 싶은데도 임기가 끝나갈 무렵 돌아보면 내가 기여한 흔적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을 느낄 때 그렇다. 규정을 바꾸고, 제도를 손봤다. 예산도 조정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조직 앞에 다시 서면 달라진 것보다 그대로인 것이 더 많다. 손을 떼는 순간 물은 다시 잠잠해진다. 그 지독한 허무함.
누군가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면 내가 남긴 것이 생각보다 적다는 느낌. 그 허전함은 관계 안에서라면 누구나 한 번쯤 마주친다. 리더라면 더욱 선명하게 찾아온다. 열심히 달렸는데 남은 게 없는 것 같은 텅 빈 공허함. 이것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다. 많은 리더들이 바로 이 지점에서 의욕을 잃고 주저앉는다. 왜 이런 허무감이 찾아오는 걸까.
풍년을 약속하는 농부는 없다
농부는 풍년을 약속하지 않는다. 그저 씨앗을 고르고, 밭을 갈고, 성실히 물을 댔는가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수확량만을 기준으로 삼는 순간, 농부는 가뭄 앞에서 무력해지기 때문이다. 가뭄이 오느냐 마느냐는 농부의 통제 영역 밖에 있다.
리더십도 같은 함정에 빠지곤 한다. '내가 이 조직을 바꿀 수 있다,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기대를 갖는 순간, 그 기대는 반드시 허무감으로 돌아온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고, 조직은 더디게 움직인다. 구성원들이 리더의 뜻을 이해하는 데도 시간이 걸리며, 그것을 자신의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 속도를 리더 혼자서 앞당길 수는 없다. 기준이 잘못되면, 최선을 다하고도 실패자처럼 느껴진다.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것, 태도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재위 19년 동안 원하지 않는 전쟁터를 전전했다. 제국의 쇠락을 눈앞에서 목격했고,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훨씬 많았다. 그가 야전 막사에서 남긴 '명상록'을 관통하는 핵심은 명확하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일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오직 지금 이 순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스스로의 태도와 행동에 집중하라는 성찰이다.
황제 역시 흔적이 아니라 태도를 기준으로 삼았다. 제국을 구했는가가 아니라, 오늘 황제로서 제대로 임했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었던 것이다. 의사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좋은 의사를 평가하는 기준은 환자를 반드시 살려내는 결과가 아니라, 최선의 진단과 처치를 다했는가에 있다고 한다. 환자가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고 해서 의사가 실패한 것이 아닌 것처럼, 조직이 눈에 띄게 변하지 않았다고 해서 리더가 실패한 것은 아니다. 결과가 아니라, 태도가 기준이어야 한다.
남편도 몰라준 생일
나는 300명의 동료에게 생일날 직접 전화를 건다. 주민등록상 생년월일을 기준으로, 하루에 한 명 혹은 몇 명씩에게 직접 수화기를 들 뿐이다. 어떤 날은 통화하다가 슬쩍 물어본다. 음력 생일을 따로 챙기시느냐고. 그러면 의외로 이야기가 따뜻하게 길어진다.
한 번은 50대의 1인 가구 동료였다. 주민등록상 그날이 생일이 맞다고 했다.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다 알게 됐다. 함께 축하해줄 가족도 없고, 가까운 친구는 몸이 아파 오기 어려워 그날 하루를 온전히 혼자 보낼 예정이었다고 했다. 내 전화 한 통이 큰 위로가 됐다는 낮은 목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한참 동안 먹먹해졌다.
또 한 번은 통화 중에 한 동료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함께 사는 남편도 몰라주는 생일인데, 이사장님이 먼저 전화를 주셨네요." 그 말에 우리 둘은 약속이나 한 듯 웃음을 터뜨렸고, 수화기 너머로 한참을 같이 웃었다. 이 전화 한 통이 당장 조직의 예산을 늘리거나 제도를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동료들은 그 순간을 기억한다. 물은 선을 지우지만, 사람은 기억하기 때문이다.
리더의 진짜 목표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리더는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 할까. 정치를 허업(虛業)이라 부르는 말이 있다. 열매는 국민에게 돌아가고, 정치인 자신에게는 텅 빈 허업이라는 것이다. 임기가 정해진 지방공기업의 이사장으로 일하다 보면, 이 말이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다. 내가 쏟아부은 것들이 조직과 사람들에게 돌아갔다면, 나에게 남는 것이 없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 모른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허무감이 조금씩 걷히는 것을 느꼈다. 내가 남기려 했던 흔적이 아니라, 내가 건넸던 것들이 사람 안에 새겨지고 있음을 떠올리면서.
물 위에 선을 긋는 일을 멈출 필요는 없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기억 하나를 남기는 것, 어쩌면 그것이 허업임을 알면서도 리더가 오늘을 살아내는 이유가 아닐까.
김주성 노원구시설관리공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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