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대학가에서 몰래 읽히던 금서들 중 대표적인 것으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광주5월 민중항쟁의 기록>이라는 책이 있다. 1985년 풀빛출판사에서 표지 디자인도 없이 출간된 이 책은 수많은 사람들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비밀리에 5·18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고 정리해 광주항쟁의 진상을 종합적으로 알린 최초의 책으로, 1982년 지하 출간된 <광주백서>(소준섭 집필)를 토대로 하고 있다. 당시 <넘어 넘어>의 초고 집필자들(이재의·조양훈·최동술)을 보호하기 위해 본인의 이름을 기록자로 빌려주고 원고를 다듬었던 소설가 황석영은 연행되었고 나병식 풀빛출판사 대표는 구속되었다.
시작과 전개
본 연재의 첫 회에서 언급했듯이 <만인보>는 '5월 광주'로 인해 구상되었고 ‘5월 광주’의 주제로 마지막 권들(27~30권)이 완성되었다. <만인보> 총 30권 중 4권이―일부의 시들을 제외하고―광주민주화운동에 바쳐진 셈이니 그 양만큼이나 의미심장하다. 이 짧은 지면에서는 빙산의 일각으로 시들을 소개할 수밖에 없으나, 5월의 그날들을 가능한 한 시로 따라가 보자.
1980년 5월17일 24시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와 더불어 고은 시인도 체포되고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연루자로 조작된다. "1980년 5월 17일 자정 / 계엄포고령 제10호 / 1979년 10월 27일 발효 / 그 비상계엄이 / … / 제주도 포함 비상계엄으로 확대되었다 // 바야흐로 총칼의 때 왔다 / … / 일체의 정치활동 중지 / 옥내외 집회시위 금지 / 언론 출판 보도 방송 사전검열 / 대학 휴교 / … // 밤거리 호외를 뿌렸다 / 이 포고령 제10호로 / 김대중 문익환 김동길 고은 리영희 등 소요조종자로 체포 / …"('시작', 27권).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가 암살된 이후, 신군부 세력의 12·12 쿠데타에도 불구하고 전국은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들끓고 있었다. "계엄령 시절 / 그 시절을 서울의 봄이라 불렀다 / 봄이라니 / 봄이라니 / … / 봄은 왔으되 봄답지 않았다 / 그 봄조차 가고 있었다 // 저 5월 13일 서울 광화문 시위로 시작하여 / 전국 도시들의 밤거리 / 잠들 줄 몰랐다 / 대낮 저자 / 머리 숙일 줄 몰랐다 // 1980년 5월 16일 / 광주 금남로 / 전남도청 분수대 광장 / 기둥 하나 / 막대기 하나 세울 데 없는 듯 / 초만원의 시위장 // 그 시대의 원점 // 대학생 3만 / 시민 몇 만 / 몇백개 횃불들 / 그 밤의 어둠을 내몰았다 / 플래카드들 / 피켓들 / 마침내 횃불행진이 시작되었다"('성회', 27권). "흉흉한 밤 숭고한 밤"에 이루어진 이 "민주성회"는 "어떤 음모도 모르는 / 순결한 평화였"고 "맹목의 자유였"으나 또한 "죽음의 제전을 앞둔" 성회이기도 했다(앞의 시).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은 참배객들의 모습. 사진/뉴시스
"빨갱이 사냥하러" "북으로 가"는 줄 알았던 '화려한 휴가'는 "광주 초토화작전"이 되어('화려한 휴가', 27권) 계엄군의 무차별적인 폭력과 살육이 자행된다. 5월21일 계엄군의 집단발포가 일어나자 시민들은 마침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장을 시작하고 시민군이 된다. 살아남기 위한 이 자연발생적 저항은 '인권'의 문제이고 '평화'와 '민주'의 문제일 뿐이었으니, 광주 시민들이 이룩한 며칠간의 '코뮌'을 보라 "보성약국은 / 약을 다 꺼내어 내놓았다 / … // 서석동 연초소매소는 / 담배를 상자째 들고 왔다 / 병원은 헌혈자로 줄을 이었다 / 황금동 술집 여자들은 / 우리도 깨끗한 피가 있어요 하고 / 헌혈대열에 섰다 / 김밥 아주머니들이 분주했다 / 대인시장에서는 / 젓갈도 / 김치도 이고 왔다 // … // 죽은 시민 / 죽은 학생 시신 / 절대로 놈들에게 빼앗기지 말자고 / 넘겨주지 말자고 / 시신 운송도 서로 맡았다 / … // 나눔이었다 나눔의 잔치였다 //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날 아픈 날"('나눔', 27권). "거리의 차들은 / 시민의 번호가 붙여졌다 / 화물수송 / 환자수송 / 청소 위생 업무를 맡았다 // 시민스스로 질서를 만들었다 / 시민 스스로 / 행정을 시작했다 // … / 은행도 / 문 열린 채 / 절도 강도 하나 없었다 / 생필품 사재기도 없었다 / 쌀집 쌀도 / 가마니쌀로 말쌀로 팔지 않고 / 되쌀로 팔았다 / 라면도 다섯 개 이상은 팔지 않았다 / 라면 한 박스 달라면 / 가게 주인이 꾸짖었다 … // 그 어디에나 나 없고 우리가 있었다 // 몇백년 만이냐 우리의 도시"('공동체', 27권).
피해자 그리고 다른 '피해자'인 가해자
5월 광주에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 중에는 노동자, 학생뿐만 아니라 재활원 구두닦이 소년도 있고('열여덟살', 27권), 운전기사도 있고('남편 김복만', 28권), "호텔 뽀이"도 있으며('양민석', 28권), 공사장 막일꾼도 있고('김인수', 28권), 집 밖에 나갔다가 총을 맞은 7살 아이 창현이도 있다('이창현', 28권).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이 많은 희생자들 한 명 한 명의 삶이 귀한 만큼 각각의 이야기도 기구하다. 마지막까지 시민군을 이끌며 5월 27일 도청에서 항쟁하다 최후를 맞이한 윤상원 열사(1950~1980)에 대한 시는 <만인보>에서 3편이 발견되거니와 그에 대해서는 조만간 따로 다루겠지만, 그가 쓰러질 때 옆에 있었던 항쟁지도부 기획실장 김영철 열사(1948~1998)의 경우 이 때 체포되어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18년간 정신질환을 앓는 고통을 겪다가 1998년 세상을 떠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가해자들에 대한 시들도 있다. 그러나 다음의 시는 광주학살의 주범인 진짜 가해자들―전두환 신군부세력과 그 배후에서 학살을 묵인한 미국 정부―에게 이용당해야 했던 또 다른 피해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시내 각 계엄유치장에서 실려온 폭도들 빨갱이들 / 헌병대 영창 일곱 개에 꽉 찼다 / 하루 내내 부동자세로 세워놓았다 / 조금만 움직이면 / M16 개머리판이 날아왔다 // … // 헌병 공창욱 중사 / 벌써 7일째 9일째 /개머리판 세례 / 곤봉 세례 / 워커 세례 / 운동장 기합 세례 전담 중사 // 4백명 / 4백 50명 / 그의 소대 거쳐갔다 / 폭도들 / 쥐도 새도 모르게 죽였다 암매장했다 / 감옥으로 보낸 놈은 차라리 행운 // 끝내 그가 돌아버렸다 공창욱 중사 / 술 퍼마셨다 / 부대로 돌아왔다 상사 중대장을 쏘았다 / 맞지 않았다 / 즉각 체포되어 / 영창에 들어갔다 / 그 무지막지한 만행 끝 / 정신이상 되어버렸다 공창욱 중사 / … // 돌았다 / 돌아서 / 나는 폭도다 나는 폭도다 외쳐댔다"('상무대 헌병 공창욱', 28권).
5월 광주 그 이후
<만인보>의 광주 시편들은, 고은 시인 스스로도 얘기하듯이, 단순히 광주의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한 진혼곡이 아니라, 그들이 마땅히 살았어야 했으나 살지 못했던 각자의 삶을 그들에게 되돌려주고 싶은 저자의 마음을 담은 것이다. 예를 들어, "스물여섯살" 청년으로 서울에서 광주로 와 "충장로 비어홀에 우선 몸 의탁"해 일하던 김성기는 "5월 21일 / 광주의 번화가 / 충장로 파출소 언저리에서 / 피살 혹은 실종 / 행방불명"되었지만, "그 어머니의 꿈 속에서 / 스물아홉살 / 서른네살 / 마흔여섯살로 / 어느새 / 잔칫상 앞에 / 저승 가신 어머님 사진아래 / 두 자식 출무성하게 자라났을 것"이고 "예순한살 환갑으로 / 어색한 나비넥타이 매고 앉았을 것"이라는, 충분히 가능한 미래를 그려 보이고 있다('김성기', 28권). 못다 산 삶을 그들에게 돌려주고 싶은 시인의 간절함 속에는 연민이 담겨 있고 이 내인(內因)은 많은 시들에서 희생자가 직접 화자가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1인칭 시점으로 표현된다. 4페이지에 걸쳐 자기얘기를 들려주는 한 시민군 청년은 "시민군 희생자 관 구하려고 / 화순으로 달려가다가 / 계엄군의 매복을 만"나 "전북 김제 들판 벽골제에 쓰레깃더미로 묻혔"으나, "살았다면 / 광주 충장로 농협 말단직원쯤으로 / 해거름 술집 찾는 중년 김남석일 것"임을, "카아 / 카아 / 독한 술맛깨나 알" 자신을 그려본다. 또한 "귀성스러운 마누라도 하나 생겨 / 함께 극장 가서 대목영화 보겠지요"라고 꿈을 꿔보지만 결국은 "나 남석이 넋 / 새로 쓴 망월동 뒤늦은 무덤으로 돌아간다오 / 거기 뒤늦은 달밤 길고 길다오"라는 독백을 남기고 사라진다('김남석의 넋', 28권). 광주 시편에서 종종 보이는 1인칭과 3인칭의 상호전환 혹은 혼합적 사용은 광주의 희생자들과 저자와 독자의 경계가 무너지는 지점이고 '살아남은 자'들의 부채감을 표현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박성현 고은재단 아카이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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