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정치서로 ‘정의’ 좇고 경제서로 ‘미래’ 보다
'키워드'로 돌아본 상반기 출판계 / 시대 반영 문학·조기대선·4차산업서 등 '눈길'
2017-06-29 08:00:00 2017-06-29 08:00:00
[뉴스토마토 권익도기자] 올 상반기 출판계는 혼란했던 과거와 작별하고 새로운 미래를 여는 일종의 ‘경계점’에 서 있었다. 연초 전직 대통령의 탄핵과 구속은 정치에 대한 생각의 물줄기를 바꿔 놓았고, 관련 도서에 대한 국민들의 대대적인 관심을 촉발시킨 동력이었다.
어수선한 시국 속 정치에 대한 관심은 사회 현상 전반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세월호 참사, 페미니즘, 민주화 운동 등을 소재로 한 문학과 사회 비평서적들이 봇물처럼 쏟아졌고, 지난해 주목받지 못하던 책들이 거꾸로 차트를 ‘역주행’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경제 분야에서는 내일을, 미래를 내다보는 서적들이 서점가의 주류 카테고리로 자리잡았다. 특히 4차 산업 혁명에 대한 열기가 고조되면서 일자리나 시장 변화 등을 다룬 책들이 독자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
올해 상반기 국내 출판시장의 흐름을 서점 판매동향과 평론가, 출판인의 의견을 취합해 되돌아 봤다.
 
대선·정치 이슈 서점가 선점
올 상반기는 정치 이슈가 서점가를 장악했다. 현직대통령 탄핵, 구속이라는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가 결정적 계기였다. 헌법, 정의, 국가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그 어느 해보다 고조됐고 관련 도서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유시민 작가의 ‘국가란 무엇인가’, 차병직 변호사 외 2명이 집필한 ‘지금 다시, 헌법’, 정치학자 조기숙 교수의 ‘왕따의 정치학’ 등이 큰 인기를 끌었다. 독자들은 이 책들을 통해 국내 정치의 현주소와 구조적 모순을 뜯어보기 시작했다.
 
28일 교보문고의 '상반기 도서 판매 동향 발표' 자료에 따르면 정치, 사회 분야의 상반기 판매권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31.3% 급증, 전 분야 통틀어 1위를 기록했다.
 
탄핵과 함께 조기대선 논의가 본격화하면서는 대권주자들의 자서전들도 큰 인기를 끌었다. 2월 문재인 대통령의 ‘대한민국이 묻는다’를 시작으로 안희정 충남지사의 ‘안희정의 길’,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의 ‘나는 왜 정치를 하는가’ 등이 연이어 출간됐고, 독자들은 그들의 저서를 통해 새로운 국정철학과 비전을 들여다봤다. 예스24가 올해 1월1일~5월30일 판매 동향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자서전과 정책 비전을 담은 후보들의 책은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207.8%나 급증한 것으로 집계됐다.
 
5월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에는 ‘문재인 신드롬’이 서점가를 휩쓸었다. 참여 정부시절 쓴 회고록 ‘문재인의 운명’ 특별판부터 그의 사진이 표지 전면에 실린 타임 아시아판, 어린이들을 위한 위인전 ‘Who? Special 문재인’까지 다양한 분야의 서적들이 사랑 받았다. 특히 타임 아시아판은 ‘문템(문재인 아이템)’ 으로 떠오르며 예스24의 상반기 종합 베스트 셀러 1위, 알라딘의 역대 일간 최다 판매량 도서 등 주요 서점가의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장은 “전대 미문의 장미 대선을 치르면서 현실 정치에 대한 중층적 이해가 출판 트렌드에 상당 부분 반영됐다”며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층위를 확장시켰고 이는 출판 역할이 확대된 현상으로도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서점가의 잡지 코너에 문재인 대통령이 커버 전면에 실린 아시아판 타임지가 진열돼 있다. 사진/뉴시스
 
현 시대 관통한 문학들 인기
정치 서적의 부상은 사회 현상 전반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져 문학 분야에도 영향을 끼쳤다. 대형 작가들은 오늘날의 시대적 문제를 주물러 가며 작품 속에 녹여냈다.
 
지난 2월 ‘갑질’의 유구한 전통과 참혹성을 그린 김훈의 ‘공터에서’를 시작으로 정치적 격변 속에서 상처받은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쓴 공지영의 단편집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운다는 내용을 담은 이외수의 ‘보복대행전문주식회사’ 등이 큰 주목을 받았다.
 
이 외에도 대한민국 여성들의 차별적 삶의 문제를 보편적인 관점에서 그려 낸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 세월호 사건을 잊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중단편소설집으로 엮은 김탁환의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5·18광주민주화운동, 6월항쟁 등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풀어낸 서명숙의 ‘영초언니’ 등 사회적 이슈를 작품화한 소설들도 다수 출간됐고 독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소설이 불안하고 혼란한 정국을 대변했다면 시와 에세이는 소소한 이야기로 독자들의 일상을 거울처럼 비추고 치유하고 위로했다. 일상에서 발견한 의미 있는 말과 글을, 짧은 글로 풀어낸 이기주의 ‘언어의 온도’는 소셜미디어(SNS) 상에서 뒤늦게 화제가 되면서 차트 ‘역주행’ 열풍의 주역이 됐다.
 
현실에 부딪힌 이들에게 위안을 주는 김수현의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김용택의 시집 필사책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 만화 보노보노 속 따뜻한 문장들을 담아낸 김신회의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 윤홍균 정신과 전문의의 ‘자존감 수업’ 등의 서적들도 독자들의 많은 선택을 얻었다.
 
예스24의 자료에 따르면 상반기 명상과 치유에 관한 에세이 판매권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35.5% 늘어나 전년에 이어 2년 연속 증가세를 이어갔다.
 
이진숙 해냄 출판사 편집장은 “시대에 꼭 필요한 책을 애초에 기획한 것은 아니었지만 올해 시기가 맞물려 ‘공터에서’, ‘할머니는 죽는다’ 등이 부각된 것 같다”며 “작품들은 정치 사회적 표현을 직접 드러내고 있진 않지만 오늘날 변화하는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있어 그 부분에 독자들이 크게 공감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2월 말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공터에서' 기자 간담회에서 소설가 김훈이 발언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이젠 미래를 열자' 4차산업서 각광
대선에서 4차 산업에 대한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면서 경제 분야에서는 관련 도서들이 크게 관심을 끌었다. 단순히 개념을 정의하는 차원이 아닌 일자리나 산업 구조 등 당장의 미래와 연결된 부분을 분석하고 변화에 대처하려는 독자들의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예스24의 집계 결과에 따르면 트렌드, 미래 예측 분야에서 4차 산업혁명 관련 도서의 판매권수는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3배 가량 증가해 45.5%의 점유율을 기록했다. 출간 종수 역시 86종으로 2016년 하반기보다 3배 이상 높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클라우스 슈밥의 제4차 산업 혁명’은 지난해 출간됐음에도, 주요 서점가의 상반기 경제, 경영 분야 베스트셀러 1위 행보를 이어갔다. 세계경제포럼의 의장 슈밥이 직접 쓴 책은 4차산업의 개념을 정의하고 기술이 ‘융합’될 미래 세상을 구체적으로 그려낸 점이 특징이다.
 
슈밥 열풍은 자율주행, 인공지능 등 4차 산업의 세부 기술에 집중한 전문서들의 출간으로 이어졌다. 독일 자동차 전문가 페르디난트 두덴회퍼가 자율주행의 미래에 관해 쓴 ‘누가 미래의 자동차를 지배할 것인가’, 세계적인 미래학자 제리 카플란의 ‘인공지능의 미래’ 등이 연이어 출간됐고,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 외에 ‘일의 미래, 무엇이 바뀌고 무엇이 오는가’, ‘필립 코틀러의 마켓 4.0’ 등 4차산업 혁명의 모습을 우리의 실생활이나 산업과 맞닿은 측면에서 분석한 도서들도 인기를 끌었다.
 
교보문고에서는 최근의 이런 추세가 지속되자 하반기에 지속될 출판 트렌드로 ‘4차 산업혁명 이후의 인간’을 꼽기도 했다. 4차 산업이 경제 분야를 넘어 기술공학, 컴퓨터, 취업과 교육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인 파급효과를 낼 것으로 전망돼 향후 도서 주제들이 인간, 철학, 뇌과학 등으로 확장될 것이라 내다본 것이다.
 
백원근 소장은 “4차 산업 서적이 각광받는 것은 출판이 하나의 솔루션으로 작용하고 있는 부분과도 맞닿아 있다”며 “보이지 않는 오늘날 현실에서 여러가지 전망이나 방향, 비전 등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 크게 반영된 게 아닐까 생각한다”고 밝혔다.
 
올 서점가의 경제·경영 분야에선 클라우스 슈밥 세계경제포럼(WEF) 회장의 '제4차 산업혁명' 책이 독보적인 1위를 차지했다.사진은 지난해 10월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4차산업혁명과 대한민국' 특별 대담에 참여한 모습. 사진/뉴시스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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