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우찬 기자] 이번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의 권고안은 암호화폐산업을 규제의 틀로 가져오며 산업 발전을 위한 초석을 다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만 암호화폐 거래소 등 업계에서는 20세기의 전통 금융산업에 준하는 규제를 21세기 신산업에 요구한다며 지나친 규제라는 비판의 소리도 나오고 있다.
암호화폐 거래소·지갑서비스 업체 등에 은행 준하는 자금세탁방지 등 의무 부과
FATF 권고안의 골자인 15안의 주요 내용을 보면 먼저 암호화폐 거래소 등 가상자산서비스제공업체에 대한 자격심사 등이 강화된다. 가상자산인 암호화폐를 '자산', '수익', '자금' 등으로 정의하며 전통 금융산업에서의 자산 가치와 동일하게 암호화폐를 규정했기 때문이다.
전통 금융자산 수준의 자산으로 분류된 암호화폐를 취급하는 가상자산서비스제공업체는 설립을 위해 관할지에서 면허 또는 등록을 받아야 한다. 국가는 면허 또는 등록 없이 설립된 이들 업체에 제재를 가해야 한다. 이 권고안은 국내 암호화폐 거래소 설립에 즉각 반영될 내용으로, 국내 규제 수준보다 강화된 조치다. 국회 계류 중인 특정금융정보법 개정안(제윤경의원 등 10인) 등에 따르면 암호화폐 거래소 운영은 신고제가 도입된다. 면허, 등록 등 허가 수준의 강화된 절차를 요구한 FATF의 권고안이 더 강력한 조치인 것이다.
또한 관계 당국은 가상자산서비스제공업체가 AML(자금세탁방지), CFT(테러자금조달차단)에 대한 적절한 규제·감독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하고 가상자산에서 발생하는 자금세탁, 테러자금조달 위험을 회피하기 위한 관련 FATF 권고안을 효과적으로 시행해야 한다. 국내의 경우 암호화폐 거래소들을 감독할 기관은 금융감독원이 될 전망이다.
가상자산서비스제공업체에 대한 법적 제재는 법인뿐만 아니라 업체의 이사 등 고위 경영진에게도 해당된다. 이는 전통 금융산업에서 컴플라이언스 업무를 맡는 준법감시인이 자금세탁 정황이 포착되면 철저한 조사를 받게 되는 것과 유사하다. 개인에게도 법적 책임을 묻는 것으로 가상자산서비스제공업체들에게는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조항이다.
암호화폐 거래 당사자 신원 확인 의무
이번 FATF 권고안의 핵심은 15안의 7번째 조항으로 꼽힌다. 먼저 7(a) 항을 보면 가상자산서비스제공업체는 1000달러 또는 1000유로 이상 거래에 대해 고객확인의무(CDD·Customer Due Diligence)를 수행해야 한다.
이어 7(b) 항은 암호화폐를 보내는 송금인과 이를 받는 수신자 등 거래 당사자 정보를 암호화폐 거래소나 지갑서비스 업체들이 금융당국에 제공해야 하며, 관계 당국이 요청하면 거래소는 거래 당사자 정보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에서 트래블 룰(travel rule)로 알려져 있는 규정이다.
업계에서는 이 같은 거래 당사자 신원 확인 의무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권고라며 반발하는 상황이다. 도쿄미츠비시은행의 아시아 태평양지역 자금세탁방지 준법감사직을 맡고 있는 김진희 이사는 이와 관련 "거래 당사자 신원 확인 의무를 암호화폐 거래소가 제일 걱정하는 부분"이라며 "블록체인 기술 특성상 수신자 정보는 볼 수 없는데, 업계에서 이 부분을 어떻게 맞춰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이 같은 FATF의 규정은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소지도 있어 이를 해결할 기술적 솔루션이 필요한 상황이다.
투기 눈초리 받던 암호화폐 산업 발전 본격화…"지나친 규제, 거래소 압박" 우려도
국제 사회에서 구속력 있는 FATF의 이번 권고안으로 각국의 암호화폐 관련 법제화에도 상당한 영향력이 미칠 것으로 보인다.
우선 투기, ICO(암호화폐공개) 사기 등의 비판을 받았던 암호화폐 시장이 규제에 편입되면서 안전한 투자처로 인식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국내 거래소의 한 관계자는 "암호화폐 관련 글로벌 기준이 마련됨에 따라 각국 법제화에 속도가 붙을 것으로 예상된다"며 "그동안 투기장으로 치부되던 거래소가 인정받는 산업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됐다. 기존 규제가 없던 탓에 난립했던 불건전한 암호화폐 거래소들을 어느 정도 걸러내면서, 투자자로 하여금 안심할 수 있는 투자처로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놨다. 다른 거래소 관계자는 "불투명한 암호화폐 시장이 투명해지고 건전한 발전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중국 블록체인 매체 비스제에 따르면 중국 국가정보센터 중국경제망 관리부문 부총괄 겸 블록체인 경제학자 주요우핑은 최근 인터뷰에서 "FATF의 최종안은 암호화폐 업계에 호재로 작용할 것"이라며 "암호화폐의 국제 송금 서비스의 규범화, 발전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기도 했다. 그는 "글로벌 암호화폐 업계에는 보다 투명한 고객확인절차·자금세탁방지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반면 이번 권고안이 블록체인 기술이 갖는 근본적인 구조를 이해 못한 규제라는 비판도 있다. 거래 송신자뿐만 아니라 수신자를 확인할 의무를 부과한 15안의 7(b)의 내용이 논란의 핵심이다.
블룸버그 보도에 따르면 글로벌 암호화폐 거래소 비트렉스의 수석 준법 책임자 존 로스는 이 조항과 관련 "월렛 주소가 익명이므로 자금 수신자를 파악하기 어렵다"며 "블록체인 기술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하거나 전 세계 거래소를 연결하는 병렬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금세탁방지를 위한 시스템 구축을 하지 못하는 등 FATF의 권고안을 충족하지 못하는 중소 규모의 거래소들이 고사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암호화폐 거래소, 지갑서비스 업체 등 가상자산서비스제공업체들은 고객확인의무, 의심거래보고 등 자금세탁방지를 위한 시스템이 필요해졌는데, 이를 위한 구축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주장이다.
거래소 관계자는 "강도 높은 AML, KYC 시스템을 구축하려면 많은 비용이 발생하고 기술적으로도 어려움이 있기에 자본과 기술력에 한계를 보이는 거래소들은 자연스레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블룸버그에 따르면 크라젠 거래소의 법률자문 매리 베스 부커넌은 "FATF가 20세기 규제 방식을 21세기 기술에 적용하려고 한다. 현 규정을 따를 수 있는 기술 솔루션이 없다"며 "업체가 부담하는 준법 감시 비용이 상당히 늘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생 산업에 지나치게 과도한 규제를 들이대고 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단계적인 규제가 필요한데, 이번 FATF 권고안은 전통 금융에 준하는 잣대를 적용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블록체인업계 관계자는 "기존 금융법을 차용하되 신산업에 맞는 방향으로 규제를 도입해야 하는데, 오직 음지경제의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무조건 투명하게 오픈하라는 강압적 규제라는 측면도 있다"며 "그러다 보면 투자자들은 오히려 음지로 숨어들 것이고 거래소를 거치지 않은 암호 자산 거래가 발생해 통제가 더욱 힘들게 되는 역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 중구에 있는 한 암호화폐 업체 전광판. 사진=뉴시스
이우찬 기자 iamrainshine@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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