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근대화의 기폭제가 된 14세기 괴질이 있다. 페스트 팬데믹은 마블 캐릭터의 최강 빌런인 타노스의 ‘손가락 튕기기’처럼 유럽 인구 ‘3분의 1’ 목숨을 앗아갔다. 괴질의 역설, 죽음 보단 가난·배고픔의 공포가 컸던 서민들의 일자리는 넘쳐났다. 덩달아 농노들의 몸값도 올랐다.
조지무쇼의 <세계사를 바꾼 10가지 감염병> 저서를 보면, 페스트가 서민의 인건비 상승과 삶의 질을 끌어올린 단초로 역설하고 있다.
오묘하게도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코로나19 팬데믹 시대인 오늘날 비슷한 유형의 패턴이 과거와 현대를 잇고 있다. 지난달 국내 사업체 종사자 수는 13개월 만에 증가세로 전환했고 지난해 임금근로자의 월평균 소득도 1년 전보다 3.6% 증가했다.
전체 임금근로자를 줄 세웠을 때 정중앙에 위치한 중위소득도 1년 새 3.5% 늘었다. 지난해 우리나라 1인당 국민총소득(GNI)도 사상 처음으로 3만5000달러(한화 약 4025만원)를 돌파했다.
‘불황’ 속 ‘활황’이라 해야 할지, 임금은 올랐지만 달달하진 않다. 임금 격차는 벌어졌고 소득 불평등은 여전하다. 한국행정연구원이 파악한 실태조사를 보면, 국민 10명 중 7명은 코로나발 소득 감소를 경험했다.
문제는 코로나 긴 터널의 끝으로 다가선 이후다. 1∼2주 내 정점을 예측한 ‘위드 오미크론’의 시작점에서 한국 경제는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건설인력 적정임금제, 요양보호사 임금소송, 삼성 노조연대 임금 인상 요구 등의 사례 처럼 코로나 후 억눌린 임금 인상의 요구가 인플레이션과 맞물려 거세질 가능성이 높다.
“내 월급 빼고 다 올랐다”는 하소연에 인플레·스태그플레이션 압박만 주구장창 쏟아내고 있지만, 정작 ‘임금 정상화’를 거론하는 이는 드물다. 임금 갈등 문제는 코로나 터널 이후 사회 전 분야에서 분출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정부는 경제 심리를 우려해 툭하면 국내 영향이 제한적이라고 말한다. 고유가발 물가 압력으로 정부가 물가를 잡을 수 있는 수단은 사실상 제한적으로 빗대일 뿐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가 어마어마한 비상 비축유인 6000만 배럴을 방출키로 했지만 국제유가는 110달러를 돌파하는 등 약발이 먹히지 않고 있다.
코로나는 전 세계가 긴밀히 연결됐음을 새삼 깨달게 했다. 한 나라의 위기가 다른 나라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는 글로벌 공급망 불안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고유가 기조와 함께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플레이션을 통제할 가능성은 희박해졌다.
인플레이션 따윈 번외로 둔 채, 대러시아 제재발로 미국 석유회사와 바이든의 미소만 엿보이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바이든의 외침처럼 임금을 낮춰 더 가난하게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치솟은 부동산과 고물가에 인건비라고 버틸 재간은 없다는 얘기다.
더 이상 중국도 싼 인건비로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최근 전국경제인연합회 보고서를 보면, 2020년 기준 해외진출 제조기업들은 1개사당 평균 매출액 1133억원, 영업이익 22억원을 기록했다. 이는 지난 2018년과 비교해 영업이익 48.7%, 매출액은 8.9% 감소한 규모다.
수익성 악화는 인건비 상승과 해외 현지법인의 비용 부담 증가가 주된 원인으로 꼽힌다. 이는 해외 진출 기업의 국내 복귀인 리쇼어링 정책을 펼치는 배경 중 하나이자, 세계적인 정책이슈다.
누군가는 말한다. 인건비 올려주면 기업 망하라는 얘기냐고. 오히려 물가 상승분을 반영한 인건비 상승이 반영되지 않을 경우 소비여력은 사라진다. 사라진 소비여력은 기업이 생산한 제품 소비에도 악영향을 준다.
미래 생존이 달린 기업들도 스마트팩토리, 로봇, 플랫폼 영역에 눈독을 들이고 있지만 노동비용을 줄이기 위한 조치로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많아질수록 생산·소비 추락의 악순환은 불 보듯 뻔하다.
코로나의 긴 터널을 지나 기업과 노동자 간의 질서 있는 정상화가 이뤄질기 바랄뿐이다.
이규하 경제부장 judi@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