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신이 말을 걸어주는 자, 즉 시인(詩人)의 시어 만을 제외한다면, 세상 가장 아름다운 언어는 인간 고유 창작으로 잉태한 영혼의 언어일 것이다.
‘트라이포트 락 페스티벌’(현재 ‘인천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의 전신)을 관람하던 1999년 7월31일, 중고교 동창생들인 이들이 비를 피하러 찾은 한 PC방에서는 열띤 토의가 열리고 있었다. 조디 포스터 주연의 영화, 원시림에서 자란 자폐증 소녀의 전신을 빌려 보여준, 여름 윤슬처럼 투명하게 바스락거리는 언어를 상기하며 말이다.
문명 세계 그 어떤 언어보다 아름다운 음악이 된다면, 달빛이 호수를 비추면 알몸으로 물에 뛰어드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그 해 기록적인 폭우가 닥친 트라이포트는 운명처럼 이들에 새 길을 열어줬다. 영화 ‘넬’(1994년 작)의 제목을 그대로 따 밴드명(이전 밴드명 ‘아일럿’)으로 바꾸기로 했다. “폭우로 공연이 없어지며 활동명을 바꿨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그때가 20살 때였으니까, 어쩌다 보니 ‘펜타포트’와 역사를 함께 하게 된 것이지요.”
밴드 넬 멤버들, 왼쪽부터 이정훈(베이스)·김종완(보컬)·정재원(드럼)·이재경(기타). 사진/스페이스보헤미안
지난 5일 ‘인천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펜타포트)’ 첫째 날 단독 헤드라이너(간판 출연진)로 오른 넬 멤버들, 김종완(보컬·기타)·이정훈(베이스)·이재경(기타)·정재원(드럼)을 무대 직전 송도 인근 호텔에서 만났다. 트라이포트 첫날 딥 퍼플 무대에 열광하던 이 록 키드들은 지금 한국을 대표하는 23년차 밴드로 우뚝 서 있다. 넬로 밴드 명을 정한 후 음악은 이들에게 새로운 행성의 언어를 축조하는 일과 같았다.
쌈지사운드(1999년 10월), 부산락페스티벌(2000년) 같은 당시 국내 대표 록 무대들에 서며 팀으로서 정체성을 다져 갔고, 2002년 가수 서태지의 괴수인디진(서태지컴퍼니 밴드 레이블)에 합류해 두 장의 메이저 앨범(‘Let it Rain’(2003), ‘Walk through me(2004)’)을 내며 대중적 록 밴드로 부상했다.
펜타포트 무대에 처음 오른 것은 2006년으로, 이후 역사(2007년 낮 무대, 2016년 영국 출신 얼터너티브 록 밴드 ‘스웨이드’와 공동 헤드라이너, 2020년 비대면 출연)를 함께 해오고 있다.
'2022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첫날 헤드라이너로 무대에 오른 넬. 사진=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주최 측
특히 2007년 낮 무대 당시, 멤버들이 취중 공연을 펼친 것은 아직까지 국내 록 페스티벌 역사에 회자될 정도다. 1집 수록곡 ‘기생충’ 라이브 무대의 화마 같은 성량은 “뉴런까지 록 스피릿인 술생충”이라며 매년 펜타포트가 열리는 이맘 때 유튜브 댓글창을 달군다.
“그 전까지 넬에 대한 대중들의 이미지가 그저 ‘조용하게 음악하는 사람들’이었다면, 그 공연이 우리에게도 전환점이 된 것은 맞는 것 같아요. 뭔가 우리의 실체랄까? 가(웃음).. 드러나면서 오히려 남성 팬들도 많이 생기고 우리도 더 편하게 음악을 할 수 있게 됐으니까.”(김종완) “무대 자체에 오르지 못했다면 문제였겠지만, 그때 우리끼리도 ‘평소보다 더 잘하지 않았나’ 내려오면서 말했던 기억이 있거든요.”(이재경)
멤버들은 당시를 “술을 먹어도 공연이 가능했던 20대 시절의 패기”라며 “그때 이후로는 무대 직전 신중을 기하려는 면도 많이 생겼다. 과거 펜타포트를 회상 때 재밌는 기억으로 봐주셨으면 한다”고 했다.
밴드 넬 멤버들, 왼쪽부터 이재경(기타)·이정훈(베이스)·김종완(보컬)·정재원(드럼). 사진/스페이스보헤미안
인천 송도 달빛축제공원에서 열린 올해 펜타포트 헤드라이너(5~7일 중 5일)로 서기 위해선 총 80분 분량의 공연을 준비해야 했다. 일반 뮤지션이나 밴드의 단독 공연 급이다.
“20살 트라이포트 때부터 우리도 함께 커온 것이기 때문에 감회가 남다르죠. 우리가 자라온 페스티벌이기 때문에 (규모를 떠나) 기분상으로는 펜타가 아직도 제일 큰 페스티벌처럼 느껴지는 지점들이 있습니다. 허나, 헤드라이너든 아니든 우리가 무대 위에서 펼치는 것은 다른 공연과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무대든 대충하지 않고, 최대한 보여줄 수 있는 걸 끌어내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김종완)
올해 멤버들은 “조명의 특별함을 위해 직접 우리가 쓰는 물량을 동원할 정도로 무대 연출에 신경을 썼다”고 했다. “어쩌다 보니 1집 때부터 최근 앨범까지 고른 곡들로 구성을 하게 됐다. 돌아보니 펜타포트와 같이 커온 우리와 그 안에 쌓인 디스코그라피 같았다”고도 했다. 실제 공연에선 ‘유령의 노래’, ‘Stay’ 같은 데뷔 초 괴수인디진 시절 음악부터 ‘기억을 걷는 시간’, ‘Cliff Parade’, ‘Ocean of Light’, ‘무홍’, ‘유희’ 등 23년 밴드사 전반에 걸친 선곡들로 관객들과 호흡했다.
단독 공연 때처럼 기승전결의 완전한 꼴을 갖추고 강약의 호흡조절을 하는 흐름이 돋보였다. 신비롭게 반짝이는 별과 은하의 LED 화면(‘백색왜성’)은 최근 제임스웹이 발표한 우주 사진처럼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것이라서. 반대로 후주를 길게 늘어뜨린 편곡과 7분 간 빨간 조명 연출의 현란함으로 채운 '믿어선 안될 말' 무대는 일종의 로큰롤 무법자 같은 것이었기에.
“낮 무대부터 더블 헤드, 그리고 단독 헤드까지, 밟아온 한 스텝씩 돌아보면 우린 펜타포트에 얽힌 드라마가 있는 팀이고, 이 무대가 끝나고 나면 우리에게도 또 하나의 의미가 생기지 않을까 싶습니다. 홍대 클럽에서부터 트라이포트, 그리고 여기까지 일련의 시간들을 거쳐 조금씩 발전해왔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김종완)
'2022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첫날 헤드라이너로 무대에 오른 넬. 사진=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주최 측
이날 현장에선 4시간 전 발표한 싱글 곡 ‘Still Sunset’도 라이브로 최초 공개했다. 밴드 사운드에 가까운 미디움템포의 기타 팝 장르. 제목에 ‘Still’을 단 이유에 대해 김종완은 “‘움직이지 않는’이란 뜻 외에도 ‘고용한’, ‘아직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뜻들이 있는 단어”라며 “그런 의미를 모두 포괄한, 각자 해석하기 나름인 석양처럼 들어줬으면 한다”고 했다.
“벌스는 최대한 구체적으로 쓰려 했던 것 같고, 후렴 가사의 경우에는 시각적 이미지를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마무리를 짓지 않는 듯한 느낌으로 쓰려했습니다. 보통 뚜렷한 감정이 느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곡 작업을 하는 편인데, 이 음악은 믹싱도 조금 더 편하게, 흘러가듯이 했으면 했어요.”(김종완) “드라이브 할 때 노을 진 바다 풍경을 생각할 수 있는 편안한 곡이 될 것 같아요. 애틋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기분 좋아지기도 하고 그 선상에 있는 음악입니다.”(이정훈, 이재경)
'2022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첫날 헤드라이너로 무대에 오르기 4시간 전 발표한 넬의 신곡 'Still Sunset' 커버. 사진=스페이스보헤미안·벅스뮤직
3일간 진행된 올해 펜타포트에는 약 13만명이 다녀간 것으로 최종 집계됐다. 개최 이래 역대 최대 규모다. 경찰 및 주최 측 추산 8월 5일 3만5000명, 6일 5만명, 7일 4만5000명을 동원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지난 3년 간 야외에서 진행되지 못한 만큼, 올해 관객들의 열기가 예년보다 뜨거웠던 것으로 풀이된다. 개최 첫날부터 2015년 가장 뜨거웠던 '서태지 펜타포트(당일 5만명, 3일 간 총 12만명 동원)'를 넘어설 것이란 얘기가 나왔다.
오랜 기간 한국 음악 페스티벌에 자양분을 내려준 페스티벌임에는 확실하지만, 이번 현장에선 아쉬움을 지적한 목소리도 더러 있었다. 첫날 입구에서부터 긴 줄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고, 스텝들 사이에서도 리허설 동안 무대 지원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은 점 등 ‘운영 미숙’에 대한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넬 멤버들도 “야외 음량 제한이 심한 여타 페스티벌에 비해 사운드에 신경쓰는 펜타포트의 정체성과 상징성을 존중한다”면서도 “동시에 아직 발전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페스티벌인 것 같다. 국가를 대표하는 록 페스티벌인 만큼 향후에는 운영의 능숙함도 뒷받침됐으면 한다”고 바람을 전했다.
밴드 넬 멤버들, 왼쪽부터 이정훈(베이스)·김종완(보컬)·정재원(드럼)·이재경(기타). 사진/스페이스보헤미안
적지 않은 세월 음악은 중력과 같은 힘을 발휘했다. 태양이 스물 세 번이나 지구를 감싸는 동안, 이들의 음악은 네 멤버를 엮고 계속해서 청중을 당긴 ‘뉴턴의 사과’ 같은 것이라서.
마지막으로 시간이 시계의 초침처럼 물리적 우측으로만 흐르지 않는다면, 하고 이들과 상상을 해보았다. 시간은 그저 사회적으로 합의한 인위적 편제일지도 모르니까.
우선, 타임머신을 타고 기억의 시간을 걸어본다. ‘돌아가고픈 펜타포트 순간이 있다면’
“‘Down’-‘One time bestseller’를 했던 2007년 그 취중 무대. 잠깐 노래를 부르다 돌아봤는데, 우리 멤버들의 표정 하나하나가 기억나요. 전부 취해서 다 해피 해피했던 상태.”(김종완) “우리끼리도 무대 아래 내려 오며 진짜 ‘기분 최고다’, ‘공연 끝나고 또 술 먹자’ 난리였지.”(이정훈) “지인들도 반응이 하나 같이 다 좋았다고 해주셔서 그날 최고였죠. 술을 더 먹었어야 하나, 더 놀았어야 하나 하는 아쉬움도 들고 그렇네요.”(이재경)
둘째, 미래로 가본다. ‘25년 뒤 펜타포트 무대에 선다면’
“팬데믹이 지난 요즘 보니까, 메탈리카가 굵직한 세계 유수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에 다 올라 있더군요. 요즘 핫하다고 하는 뮤지션들도 물론 멋있지만, 메탈리카 무대는 오히려 옛날보다 더 에너지가 넘치는 것 같아요. 우리 스스로도 지금보다 더 열정 있고, 세대에 관계 없는 음악으로 교류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김종완)
“.. 약간은 예전 페스티벌 느낌으로 조금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느낌도 있어요. 리허설 때 보니까 푸드존에도 프랜차이즈 같은 것들이 많이 들어오는 걸 보며 실감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초창기 땐 작은 규모지만 노란 전구로 꾸며 놓은, 아기자기 개성있는 예쁜 가게들이 많아 정말 축제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김종완) “맞아, 정리가 되고 깔끔하고 편해지긴 했지만, 그 감성이 없다는 것이 아쉽죠. 조금 불편해도 축제에 오면 다 내려놓고 가는, 정화되는 기분이 있었는데..”(정재원) “지금처럼 너무 정리가 잘돼서 ‘공연-공연-공연-끝’ 해버리면, ‘누구 무대가 좋았지’ 밖에 안 남을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미래엔 ... 오히려 예전처럼 돌아갔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김종완)
밴드 넬의 네 멤버들, 이정훈(베이스)·정재원(드럼)·김종완(보컬)·이재경(기타). 사진/스페이스보헤미안
<에필로그>
넬과 트라이포트, 펜타포트, 그리고 가장 좋았던 무대들(G 호텔 610호에서)
정훈: 1999년 트라이포트, 딮퍼플(Deep Purple)이 첫날 헤드 아니었어? 애쉬(Ash) 보고, 매드 캡슐 마켓츠(Mad Capsule Market’s) 보고.. 비가 점점 많이 와 가지고 ‘어떻게 되려나’ 했었지. 그때 왜 텐트촌 쫙 있었는데, 싹 쓸려내려가고.
재경: 그 텐트에 재원이 있었잖아.
멤버들: 푸하하하.
재원: 아, 맞아. 나 첫째 날 캠핑존에서 잤는데, 아침 일어나니까 얼굴 반이 물에 잠겨 있었어. 텐트를 열고 나왔는데, 다 떠내려가고 있는 거야. 취소됐대, 짐싸래, 난민처럼. 그때 근처 초등학교, 중학교로 피신하고 막 그랬어, 진짜.
재경: 익도는 그때 몇 살이었지?
익도: 하하. 저는 1999년이면 초6 때네요. 그때 무대 어땠나요?
재원: 딥퍼플 진짜 미쳤었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드러머가 하이햇 치면 물이 철렁 거렸다니까. 기타를 수건으로 닦아가면서 치고, ‘와, 열정 장난 아니다’ 생각했어. 거기 있던 사람들도 다 감동했고. 소리를 떠나서 열정적인 모습 자체가 대단했지.
재경: 무대천장도 없고 비 다 맞아가면서 악기도 젖고 한데 그 프로정신 진짜. (엄지)
익도: 근데, 트라이포트 첫 날까지만 해도 팀명이 ‘아일럿’이었던 거죠?
정훈: 그렇지. 트라이포트 둘째 날, 레이지 어게인스트 머신(Rage Against Machine) 온다고 했는데, 갑자기 폭우로 취소되는 바람에 우연찮게 PC방에 모였다가.. 넬로.
종완: 그리고 다음 날 홍대 클럽에서 ‘링’이란 팀의 단독 공연이 있었는데, 그때 오프닝 게스트로 간 게 넬로서의 첫 공연. 근데 우리가 늦게 가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잊지 못할 클로징 무대를 장식했고..
멤버들: 하하하.
정훈: 그때 관객 한 열댓명 있었나.
익도: 어쨌든 트라이포트 때부터 정말 형들은 펜타포트와 운명적으로 이어져 오고 있는 것 같네요. 가장 기억에 남는 펜타 무대라고 하면?
재경: 나는 케미컬 브라더스, 정말 최고.
종완: 나는 스테레오포닉스. 초중반 PA(public address·한정된 범위의 사람과 공간을 대상으로 증폭되고 가공된 음향을 들을 수 있도록 한 시스템)가 안 나왔었지. 뮤지션들은 보통 무대 서자마자는 잘 모르고 인이어 꼽을 때 그때 알거든. 그런데 뭐, 음향 문제 해결되고 나서는, 진짜 물 흐르듯, 사운드도 너무 좋았고.
정훈: 2008년 트래비스도 좋았지. 평소 공연 볼 때 나는 정말 신나는 밴드가 아니고서야 목석 같이 서서 ‘사운드 좋군’ 하며 보는 관객인데, 그날은 중간부터 진짜 정신 놓고 신나게 놀았던 기억이 나.
재원: 난 왜 기억이 잘 안나지.
종완: 넌 항상 취해 있었으니까.
멤버들: 푸하하하.
익도: 재원 형은 그냥 딥퍼플로?
재원: 우리가 취중 공연한 날(2007년 펜타 무대), 그 날 뮤즈가 헤드 아니었어?
재경: 아, 맞지. 근데 뮤즈는 올림픽공원에서 봤을 때가 더 좋았지. 최고였지, ‘록의 끝판왕’.
종완: 익도야, 얘는 기억 못 해. 그냥 데낄라로 적어줘.
익도&멤버들: 하하하.
재원: (핸드폰 스크롤을 오르내리다가) 아, 기억 났다. 수이사이덜 텐덴시스(suicidal tendencies)! 그때 무대로 관객 올라오라 그래서, 나 올라갔잖아.
종완: 넌 기억할라 하지마. 그리고 그냥 우리로 합시다. 2022 넬.
멤버들: 하하하. 좋네.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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