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감각적인 무대와 오페라 가수들의 화려한 목소리가 어우러져 연말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공연이었다. 1800년대 말 빈의 상류사회를 배경으로 삼아 퇴폐적인 분위기가 주를 이루지만 그 속에 다사다난한 한해 일을 잊고 새해를 맞이하자는 메시지를 심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국식 유머를 가미해 관객과 소통하려는 시도도 눈에 띈다. 쾌락 중심의 사회를 그리되 동시대적 풍자정신 역시 강조된다.
국립 오페라단이 준비한 올해 마지막 공연은 '왈츠의 왕'이라 불리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작품 <박쥐>다.
3막으로 구성된 이 오페레타의 본래 배경은 1870년경이지만 영국 연출가 스티븐 로리스의 힘을 빌어 20세기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남작의 집 실내 벽지는 연두색 바탕에 검정 무늬로 화려하게 꾸몄고, 환락의 정점을 표현할 무도회장은 댄서들로 가득한 카바레로 바뀌었다.
아이젠슈타인 남작은 놀기 좋아하는 돈 많은 한량이다. 2년 전 가장무도회에 박쥐 복장을 하고 나타난 친구 팔케를 잔뜩 술에 취하게 해 행인들의 웃음거리로 만든 일이 있었고, 그에 대한 복수로 팔케가 오를로프스키 공작의 카바레에서 아이젠슈타인을 골탕 먹인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무대 위에는 팔케와 아이젠슈타인 외에 아이젠슈타인의 아내 로잘린데, 하녀 아델레, 오를로프스키 공작, 형무소장 프랑크, 로잘린데의 옛 애인 알프레드, 변호사 블린트 등이 등장해 한바탕 소란을 겪는다.
이 극에서는 특히 언어적인 유희가 돋보인다. 표준어와 사투리를 대조하기도 하고 프랑스어를 짐짓 꾸며 말하기도 하면서 귀족들의 속물적인 근성을 강조한다.
가령 지독한 오스트리아 사투리를 쓰는 하녀 아델레는 안주인인 로잘린데와의 대화에서 아예 한국말을 쓰기도 한다.
아델레 역을 맡은 한국인 소프라노 이현이 우리 말로 투덜대면 로잘린데 역을 담당하는 외국인 소프라노 파멜라 암스트롱이 '사투리 때문에 못 알아듣겠다'고 하는 식이다. 이 밖에도 하녀 아델레는 먹을 게 마땅치 않다면서 만찬으로 삼겹살과 김치를 준비하는 등 극중에는 우리말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카바레에서 한바탕 놀기 위해 직분을 숨긴 채 프랑스 귀족으로 가장한 아이젠슈타인은 짤막한 불어를 남발해 웃음을 자아낸다.
아이젠슈타인을 잡아들여야 할 형무소장 프랑크는 이보다도 형편 없는 불어 실력을 늘어놓는다. '메르시 보꾸(Merci beacoup, 대단히 감사합니다)'를 '멸치볶음'으로, '봉주르(Bonjour, 안녕하세요)'를 '봉숭아'로 발음하는 식의 언어 유희가 극 중에서 계속 이어지는데, 외국인 오페라 가수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 더욱 재미있다.
감옥 간수 프로쉬 역으로 깜짝 출연하는 개그맨 김병만의 대사도 언어유희로 점철되어 있다.
술 취해 비틀거리며 서툰 독일어 발음으로 대사를 던지는가 하면 감옥 안의 쥐를 잡는 희극적인 동작을 선보이면서 '빼돌리쥐, 금방까먹쥐, 싸우쥐, 헐뜯쥐' 등 우리 사회에 쥐들이 너무 많다고 투덜된다.
언어 유희 외에 시각적으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3층 구조로 된 무대다. 철제 난간과 계단으로 이뤄진 기본 구조물은 1막 남작의 집, 2막 카바레, 3막 감옥 등의 기본 세팅이 된다. 여기에다 카바레 '박쥐'를 묘사하는 장면에서 이동식 바, 거대한 샴페인 잔, 대형 샴페인 모형물 등이 추가되는 식이다.
극의 갈등이 절정으로 치달을 무렵 하늘에서 거대한 샴페인 병이 내려와 무대 위의 대형 잔에 거품을 날리는데 카바레 '박쥐'의 전속 무용단 '작은 쥐'의 화려한 공연 속 쾌락의 공허함을 샴페인 거품에 빗대 적절하게 표현해낸다.
아이젠슈타인 역의 리차드 버클리스틸은 화려하고 힘찬 목소리로 영웅적 인물을 표현하는 헬덴테너의 역량을 마음껏 뽐냈고, 그의 아내 로잘린데 역을 맡은 파멜라 암스트롱은 거구의 몸집에도 불구하고 팜므파탈의 면모를 설득력 있게 표현해냈다.
테너이면서도 메조소프라노의 음역까지 아우르는 카운터테너 이동규는 높은 음역을 훌륭히 소화해 내며 어딘가 변태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오를로프스키 공작의 캐릭터에 재미를 더했다.
국내 오페라 가수들과 해외 오페라 가수들 사이 연기력의 차이는 옥의 티였다. 대사만 나오는 부분에서 특히 국내 여가수들의 연기가 부자연스러웠다.
오페레타는 대사 중심의 연극과 노래 위주의 오페라 사이에 있는 장르다. 폴카, 왈츠, 차르다시 등 다양한 춤곡과 흥겨운 노래 외에 대사 연기의 기능이 중요하다. 극 초반, 훌륭한 아리아 다음에 대사 연기 부분이 나올 때마다 흐름이 끊겨 불안감을 자아낸 점이 아쉽다.
작곡 요한 스트라우스, 대본 카를 하프너, 리하르트 게네, 연출 스티븐 로리스, 지휘 최희준, 무대·의상 기디언 데이비, 조명 사이먼 밀스, 안무가 니콜라 보위, 출연 리차드 버클리스틸, 파멜라 암스트롱, 박은주, 안갑성, 이동규 등, 12월 1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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