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광표기자] "내 건강이 허락하는 한 기업 경영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오늘 할 일과 내일 할 일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궁리하고 있다."
95세(1922년생) 고령임에도 줄곧 이같은 경영의지를 드러냈던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이 한·일 롯데 경영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그는 '맨손의 거인'으로 불리며 굴지의 기업을 만든 1세대 창업주이지만 노년의 끝자락 역시 '맨손'으로 돌아가는 쓸쓸한 말로를 맞게 됐다.
25일 재계에 따르면 롯데홀딩스는 지난 24일 도쿄 본사에서 열린 주주총회를 통해 이번에 임기가 만료된 신격호 총괄회장을 새 이사진에서 배제하기로 의결했다.
그는 이번 롯데홀딩스 이사직 퇴임으로 70년만에 롯데 그룹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됐다. 이미 지난해부터 국내 주요계열사 이사직에서 줄줄이 물러나며 그의 퇴진작업은 기정사실화 돼 왔다. 그러나 '마지막 보루'였던 롯데홀딩스 이사직까지 배제되며 이른바 '신격호의 시대'의 종식도 공식화 됐다.
신 총괄회장은 지난 70년간 일본과 한국에서 모두 이방인의 설움을 극복하고 오늘날의 롯데그룹을 일군 '불세출의 기업인'이라는 평가를 들어왔다. 한국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성장하고, '껌 장사'로 일본에 롯데 왕국을 건설한 뒤 한국에 또 하나의 롯데 왕국을 세우며 양국에서 모두 입지전적인 인물로 꼽혔다.
그는 1922년 경남 울산 영산 신씨 집성촌에서 5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0년 부산공립직업학교를 졸업한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화학공학과에 입학해 1944년에 졸업했다. 그 뒤 잠시 귀국했다가 곧바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생계를 위해 할 수 없이 생활전선에 뛰어들었고, 도쿄에 다다미방을 얻고 우유배달과 막노동 등 돈이 되는 일이면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사업에 눈을 뜨게 됐다. 맨손으로 일본 땅을 밟은 지 불과 8년 만인 1948년에 주식회사 롯데를 설립했다.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제품을 만들고 싶다는 고민을 하던 중 감명깊게 읽은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속 여주인공 '샤롯데'의 애칭인 '롯데'를 회사명으로 정했다.
롯데를 처음 세울 당시엔 과자와 청량음료 시럽, 냉동식품, 화장품, 치약 합성수지 등 거창한 계획을 세웠지만 설립 후 한동안은 풍선껌만 만들었다. 당시 2차 세계대전 직후여서 주전부리보다는 주린 배를 채우는 게 우선이었던 만큼 껌 사업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이 많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풍선껌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대박을 친 것이다. 오늘날 '롯데 왕국'의 시초가 됐다.
신 총괄회장은 일본과 한국 양국에서 사업영역이 확대되자 홀수달에는 한국에서, 짝수달에는 일본에 머물며 '현해탄 경영'·'셔틀경영'의 창시자가 되기도 했다.
다만 그의 가족사는 파란만장하면서도 비운의 장면들로 기록되고 있다. 복잡했지만 조화를 이뤘던 가족사가 경영권 분쟁 등으로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그의 말년을 더 초라하게 만든 요인이 됐다.
그는 18세 때 노순화씨와 결혼했다. 노씨는 현 롯데복지재단 이사장인 신영자씨의 모친이다. 노씨와 결혼을 한 상태에서 1941년 돌연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자신이 세 들어 살던 집주인 딸인 다케모리 하쓰코와 1950년 중혼을 했다. 신 총괄회장은 당시 하쓰코와 결혼하면서 그의 외삼촌 성씨를 따 시게미쓰 다케오로 창씨 개명을 했고, 부인 역시 남편 성을 따른다는 일본의 관습에 따라 시게미쓰로 성씨를 바꿨다.
타국에서 사업가로 뿌리를 내리기 위해 일본 명문가의 사위가 된 것이다. 일본으로 귀화한 것은 아니었지만 국내에선 '롯데는 일본기업'이라는 인식을 심게 한 배경이 됐다. 그의 세번째 부인인 서미경씨도 최근 세간에 회자됐다. 서미경씨는 제1회 미스롯데 출신으로 영화 배우로 활동하다 돌연 자취를 감췄다. 그러다가 37살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신격호의 세 번째 부인으로 깜짝 등장해 구설에 올랐다.
그는 백화점과 영화관 매점 사업권 등 알짜 사업을 소유하며 그룹 내부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 사이에서 낳은 딸 신유미씨를 신격호의 호적에도 올릴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다.
두 아들의 경영권 다툼은 그의 초라한 말년의 결정적 단초가 됐다. 신 총괄회장이 과거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셔틀경영'으로 주목받은 반면 그의 두 아들은 한국과 일본 양쪽을 오가며 경영권 다툼을 벌였다.
일각에선 신 총괄회장이 회장으로 과욕을 부려 장기간 군림하며, 후계구도를 미리 염두에 두지 않고, 고령에도 경영에 미련을 못 버린 것이 2세간 다툼의 불씨가 됐다는 지적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소위 치매라고 불리는 증상이 나타날 때까지 무리하게 왕좌를 놓치 않은 것이 이 모든 분란을 일으킨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이 업계의 시각이다.
실제 그는 경영신념 앞에선 자식에게도 매몰찼다. 2014년 12월 장남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이 수억 엔의 손해를 회사에 끼쳤다는 이유로 그를 주요 임원직에서 모두 해임했다. 회삿돈으로 투자를 하면서 보고도 하지 않았고, 회사에 결국 손해를 끼쳤다는 이유에서였다.
2015년 7월에는 반대로 동생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중국 사업 손실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둘째 아들에게도 해임카드를 내밀었다. 이는 자식과의 신의가 깨지기 시작한 발단이 됐고 분쟁의 단초가 됐다.
이후 이어진 아들간 경영권 다툼에서 신 총괄회장의 정신건강 문제가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고, 결국 이달 초 대법원에서 신 총괄회장에 대해 한정후견인을 지정하면서 정상적인 경영활동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재계 관계자는 "가장 늦게까지 현역으로 활동한 1세대 기업인인만큼 '신격호 시대'의 종식은 재계 안팎에도 큰 의미로 여겨진다"라며 "과욕을 부린 경영의지가 발단이 된 '형제의 난'과 그를 둘러싼 비운의 가족사가 결국 업적보다는 과오가 두각되는 신격호의 씁쓸한 퇴장의 배경이 됐다"고 평가했다.
신격호 총괄회장의 롯데 창업 초기 젊은시절(왼쪽)과 지난해 6월 신 총괄회장이 서울아산병원에서 퇴원하고 있는 모습. 사진/롯데·뉴시스
이광표 기자 pyoyo81@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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