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한영 정경부 기자
문재인 대통령 취임 후 장진호 전투가 수시로 언급되고 있다. 문 대통령 가족사와 연관이 깊다. 장진호 전투는 6·25전쟁 기간 중인 1950년 11월, 미 제10군단 예하 해병 1사단이 함경남도 장진군 장진호 북쪽으로 진출 중 중공군에 포위되자 2주에 걸쳐 전개한 철수작전을 말한다. 혹한 속에서도 중공군에 큰 피해를 입히고 후퇴해 성공한 철수작전으로 평가받는다. 이 와중에 유엔군 병력 10만5000명과 함께 피난민 10만 명도 무사히 흥남부두를 통해 탈출할 수 있었다. 피난민 중에는 문 대통령의 부모도 포함됐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6월28일(현재시간) 미 워싱턴주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찾아 “장진호 용사들의 놀라운 투혼 덕분에 10만 명의 피난민을 구출한 흥남철수작전도 성공할 수 있었다”며 “흥남철수작전의 성공이 없었다면 제 삶은 시작되지 못했을 것이고 오늘의 저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로도 수시로 장진호 전투의 의미를 강조하는 중이다. 지난 10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장진호 전투영웅 추모행사에서도 문 대통령은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대독한 연설문에서 “대한민국은 장진호 전투와 참전용사들의 헌신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10만 명의 피난민들이 함께 철수하는 과정에서 현봉학 박사의 공은 절대적이다. 세브란스 의전(현 연세대 의대) 졸업 후 모교 교수로 재직하던 현 박사는 6·25전쟁 당시 미 10군단 민사부 고문으로 일했다. 흥남철수작전 당시 현 박사는 10군단장인 알몬드 소장(철수작전 성공 공로로 이후 중장으로 진급)에게 피난민들을 데려가야 한다고 설득했다. 현 박사는 자서전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알몬드 소장을 찾아가 함흥 사람들의 사정을 설명하고 민간인 철수를 고려해달라고 간절히 청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입을 다물고 심각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함흥 기독교인은 아무 힘도 없는 나를 찾아와 살려달라고 애원했고, 그때마다 나는 알몬드를 찾아갔다.” 당시 자신의 역할을 비교적 담담하게 그렸지만 많은 이들이 “현 박사의 거듭된 간청과 설득이 없었다면 피난민 철수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현 박사의 공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인생 후반기를 이산가족 상봉과 민족 화해, 통일을 위해 헌신했다. 북한 주민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 어렵던 1980년대에 미·중 한인우호협회 회장을 맡아 중국 연변지역 동포들을 도왔으며 잡지 ‘중국조선어문’ 발행을 돕고 연변대 의학원에 도서를 기증했다. ‘중국 조선족 중학생 윤동주문학상’ 설립에도 도움을 줬다. 1990년대는 국제고려학회를 창립해 의료를 매개로 한 남북 화해를 위해 노력했다. 흥남철수작전 당시 피난민 10만 명을 구해냈지만 이로 인해 이산가족이 발생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생전에 이들을 만나게 하고 나아가 분단체제를 어떻게 극복할지 고민한 결과였다.
이런 현 박사를 흥남철수작전의 주역으로만 기억하는 것은 그의 공로를 절반만 평가하는 것과 같다. 현 박사와 같이 오래 전 ‘눈물로 씨를 뿌린’ 사람들의 노력에 힘입어 갈 곳을 잃은 채 절망에 빠졌던 사람들은 자유를 찾았고, 남북관계는 한 걸음 한 걸음 평화를 향해 다가가는 중이다.
최한영 정경부 기자(visionchy@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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