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범종 기자] 위기에 빠진 토마토 왕국을 구하기 위해 파란 토마토 왕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 틀려먹은 세상을 왜 구해야 하는지 의문입니다. 울퉁불퉁한 길에 비좁은 장애물, 착지를 허락하지 않는 발판···. 개발자를 찾아가 "이게 사람이 하라고 만든 게임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이 게임 제가 만들었으니까요.
저는 지난 27일 서울 강남에 있는 더샌드박스 코리아에서 대체 불가(NFT) 아바타와 게임 만들기에 도전했습니다. 그리고 평화로운 메타버스를 망치는 데는 세 시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우선 게임을 만들려면 주인공(아바타)이 있어야죠. 아바타를 만들려면, 더샌드박스가 제공하는 '복스 에딧(Vox Edit)'이라는 프로그램을 써야 합니다. 이 프로그램을 쓰면 별도의 코딩 작업이 필요 없습니다. 다양한 도구를 이용해 점을 채우거나 깎아가며 나만의 캐릭터를 만들 수 있습니다. 저는 이날 더샌드박스 공식 강사인 정용조 크리에이터의 도움을 받았는데요. 정육면체를 작은 블록 모양 지우개로 깎아내 얼굴형을 만들고, 간단한 점과 선을 넣으면 더샌드박스의 심사를 거쳐 장터에 팔 수 있습니다. 어때요, 참 쉽죠?
프로그램 오류로 못 쓰게 돼 다행인 파란 토마토 왕자. 더샌드박스가 제공하는 복스에딧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별도 코딩 없이 NFT 아바타를 만들고 장터에 팔 수 있다. 내가 장터에서 산 아바타를 직접 만든 게임의 주인공으로 만들 수도 있다. (사진=더샌드박스 복스에딧 실행 화면)
현실은 달랐습니다. 밥 아저씨를 따라 명화를 그리겠다는 꿈이 번번이 좌절된 초등학생 시절로 돌아간 듯했습니다. 점 하나 찍는 일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습니다. 그러니 'NFT 아바타'가 있는 거겠죠.
정 선생님이 학생들 모니터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변명을 준비했습니다. '동화를 성인용으로 각색한 게임 'P의 거짓'이 요즘 주목받고 있으니, 그런 느낌을 살려서 눈과 입, 그리고 턱의 균형이 조금 맞지 않게 그렸습니다.'
교육자의 인내란 이런 걸까요. 화면을 보고 멈칫하던 선생님은 "잘 따라오셨다"고 격려하셨습니다. 다른 학생들이 만든 토끼와 사람, 그 사이 어디쯤에서 끔찍한 혼종이 탄생했지만, 이게 무슨 종족이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다행인지 프로그램 오류로 제가 만든 캐릭터가 저장되지 않았고, 칼과 방패를 든 기본 인물로 게임 만들기를 실습했습니다. 하마터면 명랑 모험 활극을 공포물로 만들 뻔했습니다.
복스에딧으로 캐릭터를 만들고 나면, 이 캐릭터를 집어넣을 게임이 필요합니다. 이 때는 '게임 메이커'라는 프로그램을 실행해야 합니다. 여기에도 복스 에딧처럼 다양한 기능이 있습니다. 프로그램을 켜 보니, 흙에서 건물까지 구현할 수 있는 사물들이 무궁무진했습니다. 가상의 호수에서 언덕을 만들고, 같은 모양으로 바닥을 팔 수도 있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따라 벽을 호수에 줄줄이 붙여 길을 만든 뒤, 뛰어 오를 석판도 설치했습니다. 높낮이를 결정하는 숫자를 넣고 실행하니, 다른 게임에서처럼 석판이 위아래로 움직였습니다.
이제 땅으로 내려갈 장애물도 만들어야겠죠. 선생님이 꺼낸 건 노란 스쿨버스였습니다. 이 버스를 기울여 복사와 붙여넣기를 반복하면, 거대한 미끄럼틀이 되는 겁니다.
얼추 따라해 만든 게임을 실행해봤습니다. 처음엔 호수에 놓은 벽이 너무 얇아서 캐릭터가 번번이 떨어졌습니다. 똑같은 벽을 옆에 붙여 길을 넓히니 석판까지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후 버스에 오르는 데 성공했지만, 미끄럼틀을 제대로 타고 내려가진 못했습니다.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게임을 만들다 보니 어느새 교육 시간이 끝났습니다. 이날 저는 프로그램의 기능이 아닌, 가상 세계를 살아 숨쉬게 만드는 '점'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다듬는 점의 숫자만큼 고민이 늘어나고, 그만큼 가치있는 콘텐츠가 만들어집니다. 고생스럽다는 것을 느끼니 결과물에 대한 보상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엔 될까?’ 27일 만든 게임의 주인공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석판을 넘어 스쿨버스 미끄럼틀로 착지를 시도하고 있다. (사진=더샌드박스 게임메이커 실행 화면)
더샌드박스는 사용자가 만든 NFT 콘텐츠를 공유하고 수익도 얻는 기회의 땅, 메타버스 플랫폼을 운영하는 회사입니다. 16만6464개의 '랜드(땅)'가 있는데, 일종의 부동산입니다. 사람들은 더샌드박스로부터 이 랜드를 분양 받거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들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전체의 70%이상이 팔렸고, 약 1만7000명이 랜드를 갖고 있습니다. 더샌드박스 NFT 거래소인 마켓플레이스에서 아바타와 아바타가 입는 옷 등 각종 아이템 거래 수수료는 5%입니다. 그리고 국제 NFT 거래소 오픈씨(OpenSea) 등을 통한 사용자 간 거래 수수료 일부를 더샌드박스가 가져갑니다. 여기서 쓰이는 가상화폐는 샌드(SAND)입니다. 1샌드 가치는 552원이고, 1랜드 분양가는 1011샌드(약 56만원)입니다.
이렇게 구한 랜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다양합니다. 사용자가 직접 만든 게임과 상점, 전시장, 콘서트홀 등 사람들이 어울리는 메타버스를 구현합니다.
랜드를 가졌지만 이런 공간을 만드는 게 어렵다면, 다른 사람에게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고 콘서트장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만드는 게임도 사이버 펑크와 중세 판타지, 어드벤쳐, 생존 등 여러 가지 장르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마터면 공포물이 될 뻔했던 저의 토마토 왕국 이야기처럼요.
더샌드박스는 게임 제작자나 스튜디오가 메타버스에서 게임을 만들고 광고하며 유료화하는 모든 과정을 지원한다고 합니다. 현재 롯데월드와 CJ ENM 등400개 넘는 파트너 브랜드와 협업해 NFT 제작·판매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날 천지창조의 고통을 느낀 뒤에 내린 결론은 C2E(Create to Earn)의 즐거움이었습니다. 더샌드박스 관계자는 "2012년 2D판 출시 경험을 토대로 창작자가 노력과 재능을 오롯이 쏟아부은 작품의 결실을 최대한 많이 가져가는 체계를 세워, 2018년 3D 그래픽에 블록체인을 접목했다"며 "누구나 콘텐츠 제작자가 될 수 있는 세상에서 얼마나 적절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범종 기자 smile@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나볏 테크지식산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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