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임유진 기자] 기업가치 제고를 위해 이사의 충실의무를 '회사를 위한 것'에서 '주주 이익을 위한 것' 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안이 다수 발의된 가운데, 상법상 지배구조 규제가 밸류업의 만능열쇠가 아니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동시에 경영권 방어수단 도입·상속세 완화 등 기업 지배구조 관련 법제도 전반에 대한 종합적 검토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28일 상의회관에서 '밸류업과 지배구조 규제의 최근 논의와 과제'세미나를 개최하고 이같이 밝혔습니다. 세미나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는 단기주주 이익과 장기주주 이익 상충 시 분쟁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며 "불분명하고 추상적인 규정으로 기업 혼란을 가중하는 등 부작용이 우려된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밸류업과 지배구조 규제의 최근 논의와 과제 세미나: 강석구 대한상의 조사본부장(오른쪽 첫번째)과 주요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사진=대한상의)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 개념 모호 경영혼선"
발표자로 나선 곽관훈 선문대 교수는 "우리나라와 같은 대륙법계 국가인 일본은 물론 영미법에서도 이사는 회사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며 "이사의 주주에 대한 의무를 판례로 인정한 경우는 있어도 법에 명시하고 있지는 않다"고 소개했습니다.
곽 교수는 특히 '총주주의 이익', '주주의 비례적 이익', '주주를 공정(공평)하게 대할 의무'등이 개념적으로도 모호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사의 구체적인 책임범위와 행동지침을 제공하지도 못한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처럼 불명확한 법 개정은 이사의 경영판단을 위축시켜 기업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곽 교수는 "일본의 경우 1981년 상법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도입하는 방안, 2014년 모회사 이사의 자회사 감독책임을 명문화하는 방안 등이 검토됐으나 개념과 책임범위가 모호하다는 이유로 개정이 보류됐다"며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가 선언적 규정에 그친다 해도 판례 등으로 구체적 기준이 정립되기 전까지는 기업 경영의 불확실성을 크게 증대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최승재 세종대 교수는 이사의 충실의무에 대해 "지금 문제가 되는 이해상충 사례들은 '이사 대 주주'가 아닌 '지배주주 대 일반주주'"라며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를 인정해도 배당 등 단기주주 이익과 신사업 발굴 등 장기주주 이익이 상충할 때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최 교수는 또 다른 지배구조 규제안으로 논의되는 집중투표제 의무화나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 등에 대해서는 "기업 활력 저해 등 부작용이 우려되는 일률적·경직적인 규제 도입보다는 그러한 제도가 기업가치 제고에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기업들이 자유롭게 도입여부를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했습니다.
최 교수는 상법과 세법, 공정거래법 등 관련 법제를 유기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어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만이 밸류업의 만능열쇠처럼 다뤄지는 상황이 우려스럽다"며 "지배구조 문제와 연관된 상속세 개선과 경영권 방어수단 보완, 공정거래법상 계열사간 내부거래에 대한 사익편취 규제의 효율성을 높이는 방안 등을 더 넓은 시각에서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제언했습니다.
밸류업과 지배구조 규제의 최근 논의와 과제 세미나: 곽관훈 선문대학교 법·경찰학과 교수가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사진=대한상의)
"문제사례만 핀셋 보완해야"
이밖에 토론에서는 △ 법이 아닌 연성규범으로 해결 △ 문제사례만 핀셋 보완 △ 배임신고 등 부작용 보완 등이 거론됐습니다.
강영기 고려대 연구교수는 "이사의 법령 등 위반으로 주주들이 직접 손해를 입은 경우처럼 민법상 불법행위책임이 인정되는 경우 외에 이사가 직접적인 계약관계가 없는 주주에 대한 의무를 부담하는 상황은 상상하기 어렵다"며 "소수주주 보호를 위해일본처럼 거래소 공시규정을 강화하는 등 법이 아닌 연성규범을 통해 주주 간 이해상충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습니다.
한석훈 국민연금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 위원장은 "회사의 이익과 총주주의 이익은 다르지 않으므로 이사에 대해 회사를 위한 의무 외에 주주 보호를 위한 의무를 추가하는 상법개정안은 불필요하다"며 "'주주의 이익'을 주관적 입장에서 오인하는 주주들에 의한 법적 분쟁만 증가시킬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법체계 전반에 파급효과가 큰 상법 개정보다는 문제 사례별로 핀셋 보완이 필요하다"고 진단했습니다.
김지평 김·장 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충실의무의 대상으로 회사의 다른 이해관계자 외에 주주만을 추가하면 이사가 채권자 등 다른 이해관계자의 이익보다도 주주 이익을 우선해서 고려해야 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면서 죄형법정주의 침해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만큼 종합적 고려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스니다.
지인엽 동국대 교수는 "논의 중인 충실의무 법안 중에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 실천에 대한 것도 있다"며 "이는 오히려 주주가치 극대화라는 주주자본주의의 기본가치와 모순될 가능성이 있는 만큼 법으로 강제할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제도와 관행으로 확산해나가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했습니다.
황현영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기업이 IR·배당·주주총회 등에서 주주를 대하는 실무관행을 돌아보고 주주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는 관점에서 충실의무 개정 논의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강석구 대한상의 조사본부장은 이날 개회사를 통해 "상법 개정안이 외국 투기자본이 단기차익을 실현한 후 주식을 팔고 나가는 것을 도와주는 '해외투기펀드먹튀조장법'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우려된다"며 "특히 중견·중소기업의 경우 비교적 적은 자본으로도 경영권 공격이 가능하고 대응여력도 부족한 만큼 충실의무 확대가 반드시 필요한 조치인지 면밀히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임유진 기자 limyang83@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고재인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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