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성휘 기자] 북한이 9일 남북 정상 간 '핫라인'을 비롯해 남측과의 모든 연락채널을 끊고, 대남업무를 '대적사업'으로 선포한 배경에는 역설적으로 한국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인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오전 "김영철 노동당 중앙위 부위원장과 김여정 제1부부장이 북남 사이의 모든 통신련락선을 완전 차단해 버릴 데 대한 지시를 내렸다"고 보도했다. 이어 "이번 조치는 남조선 것들과의 일체 접촉 공간을 완전 격폐하고, 불필요한 것들을 없애버리기로 결심한 첫 단계의 행동"이라며 추가 조치를 예고했다.
주목되는 부분은 북한이 '단계적 대적사업 계획'이라고 밝힌 대목이다. 우리 측의 대응에 따라 단계적으로 악화될 수도, 아니면 호전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 것으로 보인다.또한 이번 조치를 남측을 잘아는 김영철 부위원장과 김여정 제1부부장이 주도한 것에도 주목된다. 김 제1부부장은 남북 정상회담에 깊숙이 관여해 왔고, 평창올림픽 당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특사로 남측을 방문하기도 했다. 김영철 부위원장 역시 남북 협상에 잔뼈가 굵은 인사다.
결국 북한의 이번 조치는 남북 관계에 정통한 인사들이 주도해 일종의 '벼랑 끝 전술'을 펼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힘을 얻는다. 남측에 대한 누적된 불만과 코로나19로 인한 북한 내 어려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남북미 한반도 정세는 2018년 2월 평창동계올림픽을 시작으로 3차례의 남북 정상회담과 2차례의 북미 정상회담, 남북미 판문점 정상회동 등 급속도로 진전됐다. 그 배경에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노력, 미국의 대북제재를 풀고 경제개발을 하겠다는 김정은 위원장의 의지가 있었다.
그렇지만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북미회담이 기대와 달리 ‘노딜’로 끝나면서 북미 협상은 그대로 멈췄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재선 문제까지 겹치면서 향후 북미관계 전망은 불투명하다.
멈춰버린 북미관계는 남북관계에도 영향을 줬다. '한미 워킹그룹'이 대표적이다. 당초 워킹그룹은 북미와 남북관계 선순환을 위한 실무진들의 논의를 위해 조직됐지만, 북미관계가 공전하면서 남북관계 개선의 발목을 잡는 장애물이 돼 버렸다.
결국 북한은 지난해 말 노동당 전원회의를 통해 '자력갱생에 의한 경제 정면돌파전'을 선언했지만, 갑작스런 코로나19 확산에 막혔다. 북한 경제를 지탱해온 '북-중 무역'마저 코로나19로 중단 상태다. 북한의 돌파구가 남북관계 재정립이 된 이유다.
여기에 코로나19로 어려워진 사회 내부 기강 다잡기 측면도 있어 보인다. 북한은 최근 남북갈등을 '노동신문'에 연일 보도하고, 각종 항의 군중집회를 펼치고 있다. 내부의 불만을 외부의 적에게 돌리는 전략이다.
일단 북측은 김여정 부부장이 담화에서 언급한 △개성공단 시설 철거 △남북 공동연락사무소 폐쇄 △9·19 남북 군사합의 파기를 순차적으로 이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은 지난 5일 "우리도 접경지역에서 남측이 골머리가 아파할 일판을 벌려도 할 말이 없게 될 것"이라며 "우리도 남측이 몹시 피로해 할 일 판을 준비하고 있으며 시달리게 해주려고 한다"고 경고한 바 있다.
이에 전문가들은 정부가 북측의 움직임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판문점선언 이행 차원에서 대북전단에 원칙적이고 단호하게 대응하며 관련 입법에 속도를 높여야 한다고 조언한다.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구체적인 노력도 필요하다.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나서지 않은 점에서 '반전의 기회'는 언제든지 있다는 분석이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9일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회관에서 열린 '6·15공동선언 20주년 기념 토크콘서트' 초청 강연에서 "여당과 정부가 (대북)전단 살포 금지법을 강력히 만들어나가야 한다"며 "대충 얼버무리면 문재인 정권에서 남북관계는 끝이 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북한 눈치 보기'라는 야당 등의 비난은 감수해야 한다"면서 "대북전단을 날리는 권리가 우리의 평화, 접경지 주민의 안전이라는 가치만 못하다고 할 수 있느냐"며 코로나19 남북 방역협력 등도 신속히 추진하자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6월30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자유의 집 앞에서 대화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성휘 기자 noirciel@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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