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민승 법률전문기자] 버스나 지하철엔 임산부 배려석이라는 게 있습니다. 대중교통좌석 가운데 일부를 임산부용 교통약자석으로 지정한 겁니다. 2013년 12월 서울시에서 시내버스와 지하철 좌석의 일부를 임산부 배려석으로 처음 지정한 이후 점차 전국적으로 도입됐습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다가 사람이 몹시 붐빌 때면 자연스레 임산부 배려석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비어있는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도 되는 걸까요. 임산부 배려석이 설치된 지 벌써 10년이 넘었는데요. 임산부가 아니더라도 비어있는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도 되는지는 이 제도가 도입될 당시부터 지금까지도 논란입니다.
지난 23일 한 시사프로그램에선 임산부 배려석에 앉은 중년 남성이 임산부 배지를 단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모습이 방송됐습니다. 끝내 중년 남성은 임산부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남성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임산부에게 양보해 줬습니다. 결국 임산부 배려석엔 중년의 남성이 앉았고, 임산부는 그의 옆의 일반 좌석에 있는 촌극이 벌어지게 됐습니다. 이런 모습이 방송되자 임산부 배려석에 대한 논란이 다시 불붙었습니다.
서울지하철 4호선의 임산부 배려석. (사진=뉴시스)
최근 서울시 정책제안 사이트인 '상상대로 서울'에는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에 앉는 사람이 임산부인지 아닌지를 감지하는 센서를 설치하자는 글이 올라왔습니다. 하지만 서울시는 이런 제안에 난색을 표했습니다. 일단 일반 승객이 임산부 배려석에 앉는 것을 막을 법적 근거가 없습니다. 자칫 이런 해법은 또 다른 갈등을 더 조장할 수 있다는 겁니다. 또 서울지하철의 규모와 이용객 숫자 등을 고려하면 센서를 설치하고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도 막대할 걸로 보입니다. 갈등을 유발하는 건 둘째치고 비용 측면에서도 당장 도입하기는 힘들다고 판단한 걸로 보입니다.
부산지하철은 2017년부터 발신기를 가진 임산부가 전동차에 타면 임산부 배려석의 수신기에서 '자리 양보'를 권하는 음성 안내와 불빛 신호가 나오는 '핑크라이트'시스템을 도입해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어 2022년부터는 광주지하철과 대전지하철에도 비슷한 기능의 알림 시스템을 도입해 시행하고 있는데요. 자리 양보가 늘고 임산부 아닌 승객이 임산부 배려석에 앉았다가도 안내 음성을 듣고 놀라서 자리를 옮기는 비율이 높아지는 등 효과가 확실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에서는 임산부를 일상생활에서 이동에 불편을 느끼는 교통약자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임산부는 국토교통부 장관이 5년 단위로 세우는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계획의 고려 대상이기도 합니다. 현재 법으로 설치가 강제되는 임산부 관련 시설은 임산부 휴게시설입니다. 임산부 배려석은 제외됐습니다. 임산부를 위해 임산부 배려석을 비워두거나 양보하도록 강제할 근거가 없는 겁니다.
2023년 10월10일 서울교통공사와 서울시 동부권직장맘지원센터가 임산부의 날을 맞아 서울 송파구 잠실역에서 임산부 배려문화 조성을 위한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사진=뉴시스)
임산부 배려석에 설치된 센서를 통해 나오는 음성 안내와 불빛 신호 등은 자리를 옮기거나 양보하도록 유도하는 장치입니다. 유도는 심리적 강제의 일종입니다. 결국 핑크라이트는 일종의 심리적 강제 수단을 통해 임산부 배려석을 비워두거나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하도록 하는 측면이 있는 겁니다. 하지만 효과가 있고 빠르다는 이유로 모든 사안에 대해 강제성을 동원한다면 '규제 만능주의'에 빠지거나 불필요한 갈등을 조장하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임산부 배려석에 대해 지속적으로 홍보를 하고, 캠페인을 통해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일 겁니다. 저출산이 국가적 위기로 대두되면서 임산부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높아지는 추세입니다. 이런 경향을 고려한다면 지금은 임산부 배려석 정착을 위한 홍보의 적기로 보이는데요. 임산부의 어려움을 알리는 등 공동체가 약자에 대한 배려 의식을 높일 수 있도록 유도하는 정책을 꾸준히 펼친다면 임산부 배려석이 진정한 '배려석'으로 정착될 것입니다.
김민승 법률전문기자 lawyerms@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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