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오세은 기자] 제주항공 참사 여객기에 설치된 블랙박스가 사고 직전인 충돌 4분 전부터 작동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면서 원인 규명에 난항이 예상되는 가운데, 사고기를 포함해 국내에 도입된 동일 기종(B737-800) 절반 가량에는 예비 전력을 블랙박스에 자동으로 공급하는 보조장치(RIPS)가 없었던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사고기 셧다운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전력공급이 중단되는 비슷한 사고가 발생할 경우 원인 규명이 어려울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지난달 31일 오전 전남 무안국제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충돌 사고 현장에서 경찰 과학수사대가 현장감식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13일 <뉴스토마토> 취재를 종합하면, 국내에서 운용 중인 101대의 B737-800 중에서 절반 이상인 56대에는 블랙박스인 조종실음성기록장치(CVR)에 자동으로 전력을 공급하는 ‘보조전력장치(RIPS)’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보조전력장치는 전원이 셧다운됐을 때 최소 9분에서 최대 11분 동안 CVR에 전력을 공급하는 일종의 보조배터리입니다.
블랙박스는 비상시 최후의 상황을 기록하는 장치인 만큼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 보조전력장치 탑재가 반드시 필요하지만, 2018년부터 의무화되다보니 그 이전에 국내에 들어온 사고기를 비롯한 절반 가량의 여객기가 제외된 것입니다.
앞선 11일,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는 사고 직전 4분 가량의 데이터가 CVR과 비행기록장치(FDR) 둘다에 저장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4분은 기장이 조난 신호 직후인 오전 8시59분부터 복행(착륙 시도를 포기하고 재차 상승하는 것)해 콘크리트 둔덕에 충돌한 오전 9시3분까지입니다. 결국 사고기가 셧다운이 된 이후 RIPS 미탑재로 인해 관련 기록이 저장되지 않았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립니다.
전문가들은 상식적으로 CVR 존재 이유가 사고 원인 규명에 있다는 점에서, 의무화 대상이 아니라고 사고기 등에 이를 탑재하지 않은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지적합니다. 이휘영 인하공업전문대 항공경영학과 교수는 “CVR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사고 원인을 찾기 위해 항공기 설계 단계서부터 만들어지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보조전력장치가 없다는 건 이해되지 않는다”며 "이로 인해 사고 원인 규명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국토교통부도 RIPS 미탑재로 인해 사고 원인 규명에 한계가 있을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보조전력장치 탑재율이 저조한 원인으로는 비용 절감이 꼽히고 있습니다. 국내 저비용항공사(LCC)는 해외 항공사에서 비행기를 임차(리스)해 운영하는 경우가 많아 안전 성능을 더 강화할 유인이 낮다는 것입니다. 이번 사고기 역시 유럽 저가항공사인 라이언에어에서 임차해 들여온 비행기입니다.
한편, CVR에 보조전력장치 설치가 의무화된 것과 달리 또 다른 블랙박스인 ‘비행기록장치(FDR)’에는 해당 의무가 없습니다. FDR은 비행 경로, 속도 등 전자 신호를 기록하는 장치로 항공기가 셧다운이 되면 전자 신호가 모두 사라져 기록할 데이터 자체가 없다 보니 굳이 보조전력장치를 둘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세은 기자 ose@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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