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23일 육군 수도방위사령부에서 강당에 김홍일홀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현판식을 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김도균 당시 사령관의 모습이다.(사진=수방사)
육군 수도방위사령부에서 2020년 9월에 있었던 일입니다. 김도균 당시 사령관이 사령부 강당에 김홍일홀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현판식을 열었습니다. 김 사령관은 김홍일 연구자를 불러 부대 장병한테 김 장군의 생애를 교육했으며, 한국전쟁 당시 김홍일 장군이 지휘한 한강 방어선 전적지도 함께 답사했습니다.
2024년에는 김해석 예비역 육군 중장이 대표가 되어 김홍일장군기념사업회를 만들었습니다. 11월13일에 '5성 장군 김홍일의 생애와 업적'을 주제로 제2회 학술회의를 열었죠.
김홍일 장군(1898~1980)은 우리 독립운동과 국방 역사, 현대 정치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도 국방 분야에서는 오랜 세월 그의 발자취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그의 존재를 아는 군인마저 드물죠. 사람들이 김홍일의 생애와 리더십을 기리기 시작했는데요. 의미가 깊으면서도 때가 많이 늦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홍일은 1898년 9월23일 한국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태어났습니다. 7살 유년 시절에 러일 전쟁이 일어나고 자기 집이 러시아군한테 징발되는 일을 겪었습니다. 얼마 뒤 일제가 국권을 강탈했죠. 김홍일은 민족사학인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황해도 신천 경신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며 독립운동을 조직하다 체포됐습니다. 김홍일은 군인이 되어 나라를 되찾겠다고 결심하고 중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는 1919년 12월 중국 귀주 육군무술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귀주군대에 복무하다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갑니다. 임시정부와 연계하고 중국 동북지역으로 이동해 한국 의용군 중대장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때가 1920년 봉오동 청산리 전투 직후인데요. 일본군이 대대적으로 반격을 폈습니다. 독립군이 강제해산 당하는 자유시 참변도 벌어졌습니다. 중국 동북지역에서 한국 독립군 대열로 무장투쟁을 하기가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는 상황에서 중국군에 참여해 일본과 싸우는 것도 독립운동 노선 가운데 하나이죠. 김홍일은 1925년 광저우로 이동해 중국 국민혁명군에 참여합니다. 북벌 전쟁에서 용감히 싸웠고 진급을 거듭했습니다. 중일전쟁이 확대되자 김홍일은 1941년 상가오 전투에서 중국군 사단장으로 일본군과 싸워 일본군 1만5000명을 전멸시키는 큰 승리를 거뒀습니다. 중국 국민혁명군에서 한국인 최초로 별을 달고 2성 장군으로 올라갔죠.
김홍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도 관계를 꾸준히 유지했습니다. 1931년 상하이 병공창(병기 제조공장) 병기 주임으로 근무할 때는,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가 거사에 사용할 폭탄을 제공했습니다.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요청에 따라 김홍일은 1945년 5월 광복군 참모장을 맡았습니다.
김홍일은 정부 수립 뒤 국군 준장(별 하나)이 되었는데요. 1950년 6월25일 북한 공산군이 남침했습니다. 하루 뒤인 6월26일 국방부에서 대통령 지시로 '현역과 원로 군 경력자 긴급 합동회의'가 열렸습니다. 신성모 국방부 장관과 채병덕 육군 참모총장, 참모학교장 김홍일, 이범석 전 국방부 장관, 전 광복군 사령관 지청천 등이 참여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범석 김홍일 등은 한강 이북은 포기하고 전력을 한강 이남으로 질서정연하게 집결시켜 한강선을 방어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전쟁을 해보지 않은 신성모와 채병덕 등은 서울을 사수하겠다며 서울 북방 결전을 주장했죠. 이들은 평소 전쟁이 나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거라고 큰소리쳤습니다. 어떻게 됐죠? 국군 주력 부대는 한강 이북에서 병력과 장비 대부분을 잃었고, 이승만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은 서울시민을 버린 채 한강 철교를 폭파하고 달아났습니다.
정부는 김홍일을 시흥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한강 방어선을 맡겼습니다. 당시 국군 지휘부 대다수는 일본군, 만주군 출신이었죠. 잘해야 대위나 소령 계급을 해봤고 나이는 30대 초반이었습니다. 김홍일은 그때 52세이며 국군에서는 유일하게 사단급 대부대를 지휘해본 경험이 있었죠.
당시 미군 쪽은 부산에 상륙한 24사단이 수도권까지 이동할 시간이 필요하니 3일만 시간을 벌어달라고 국군에 요청했습니다. 국군은 장비와 인원이 부족한 상태에서 6일을 한강 방어선에서 버텼습니다. 한강 방어선이 무너진 다음에는 김홍일은 1군단장이 되어 중부 지방에서 북한군 진격을 어느 정도 지연시켰습니다.
왼쪽부터 첫 번째 사진은 국군 1군단장 시절 김홍일 장군, 두 번째는 백범 김구 임시정부 주석과 김홍일 장군, 세 번째는 중국 장졔스 주석과 김홍일 장군의 모습이다.
지휘관으로서 유능했던 김홍일은 전쟁 중인 1951년 4월에 중장 계급으로 예편했습니다. 군 내부 파벌 다툼 결과로 본인 의사와 달리 군복을 벗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육군에서는 일본군, 만주군 출신자가 1대~18대 참모총장을 했고, 김홍일 같은 독립군 광복군 출신자는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습니다.
김홍일은 5·16쿠데타에 가담했다가 박정희 정권이 실정을 계속하자 정권 비판 대열에 참여했습니다. 1965년에는 재야인사들과 대일 굴욕외교 반대 투쟁을 벌이다가 구속됐죠. 1971년 총선 때는 신민당 총재권한대행으로 선거를 지휘해 과반수 가까운 의석을 얻는 성과를 냈습니다. 김홍일은 유신체제 반대 운동에도 참여했습니다.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1979년 12·12 쿠데타 때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했습니다. 그 뒤 육군사관학교에서 정승화 이름이 들어간 기념물을 철거했습니다. 그를 공적인 기억에서 지워버렸죠. 김홍일도 비슷했습니다. 박정희와 유신체제에 항거했던 김홍일을 국방 행사 어디에서도 호명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1대~10대 육군 참모총장을 차지한 일본군, 만주군 출신자들이 군맥의 대표자인 것처럼 상징성 있는 공간을 독차지했죠. 빛나는 독립전쟁을 계승해야 할 한국군의 정통성이 엉뚱한 방향으로 일그러졌습니다.
김홍일장군기념사업회 홈페이지를 보면 김홍일을 독립과 호국, 민주화를 함께 실천한 인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독립은 독립운동, 호국은 한국전쟁 참전, 민주화는 반유신 투쟁을 일컫는 것이죠. 그중 한 가지만 실천해도 훌륭한데 김홍일은 세 가지를 실천했네요. 이런 분을 국방 영역에서 오랜 세월 '없는 인물'로 취급했다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때늦게나마 뜻있는 사람들이 김홍일을 기리고 있습니다. 응원을 보냅니다.
■필자 소개/박창식/언론인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광운대에서 언론학 석사와 박사를 했다. 한겨레신문 문화부장 정치부장 논설위원을 지내고 국방부 국방홍보원장으로 일했다. 국방 커뮤니케이션, 말하기와 글쓰기, 언론 홍보와 위기관리 등을 주제로 글을 쓰고 강의하고 있다.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신형 정치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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